[황인영 PD의 방송 이야기] 날 믿어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황인영 TV조선 예능국장 2021. 10. 23.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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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하다. 딱히 관련도 없으면서 한숨이 나온다. 그와 연결된 사람들의 고생길이 눈에 보여서다. 출연진과 관련한 크고 작은 이슈가 생기면, 제작진은 그야말로 비상사태에 놓인다.

“단독 기사 뜬 거 보셨어요?”로 시작되는 긴급 상황의 초반에는,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안갯속의 정황을 유추하며 이럴 경우는 이렇게, 저럴 경우는 저렇게 해야 하나, 이리저리 대책을 셈해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단계. PD와 작가들이 멍하니 회의실에 앉아서 짙은 한숨만 주고받는 ‘고통스러운 침묵’의 시간이다. 그러다 누군가는 “에잇, 편집하러 갈게요”하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고, “자자~ 커피나 마시자!”며 팀장의 법인카드가 조연출의 손에 건네지길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담당 작가의 전화벨이 울린다. 일순 팽팽해진 공기 속에서 전화기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향하는 그의 등에 모두의 시선이 꽂힌다. 모스부호처럼 희미하게 들려오는 “네… 네네, 아~ 네… 네네…” 소리에 촉각이 곤두선다.

황인영 TV조선 예능국장

다행히 “오보랍니다” 하고 웃으며 들어온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에이, 일할 시간만 뺏겼네!) 슬픈 예감이 사실로 확인되는 경우에는 사태 수습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공식 입장을 쓰고, 편집을 다시 하고, 숨 가쁘게 대체 섭외를 하는 ‘분주한 고통’의 시간. 빠듯한 시간 안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매끈하게 방송을 만들어내야 하는 노동의 괴로움도 괴로움이지만, 나름 악명 높은(?) 방송국 자(者)들을 더 괴롭게 하는 건 불의의 사고 때문이든, 철없던 시절의 잘못 때문이든 제작진을 고통에 빠지게 한 이가 다름 아닌 동고동락했던 동료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진심으로 고마웠고, 때로는 배를 잡고 함께 웃던. 분초를 다투며 일을 수습하는 와중에 배신감과 안타까움, 경우에 따라 시청자에 대한 죄책감까지 범벅된 감정을 소화하느라 곤욕을 치러야 한다.

조연출 시절, 한 출연자가 뒤풀이 자리에서 들려준 일화가 생각난다. 데뷔 시절을 함께한 기획사 대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 되어줄 50명을 만드는 것을 연예계 생활의 목표로 삼아라. 진정한 내 편 50명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런 자세로 살아간다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고 당부했단다. 꼭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인생을 대하는 좋은 마음가짐 같아 잊지 않고 있는 그 이야기가 소란스러웠던 지난주, 오랜만에 다시 떠올랐다. ‘내 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방송인’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겸허한 마음으로 곱씹어보게 되는 한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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