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회색 코뿔소’가 다가온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21. 10. 23.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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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쉽게 간과하는 위험 요인
가계부채 증가 잡는다고 금융위 ‘총량규제’ 극약 처방
내년 4% 증가율 목표, 실수요 감안해 상향 조정을

코뿔소는 소가 속한 우제목이 아니라 말이 속한 기제목에 속한다. 말의 사촌쯤으로 볼 수 있다. 반대로 하마는 말이 아니라 소와 근연 관계다. 육상 동물 중 가장 헤비급에 속하는 이 두 동물은 애초 작명부터 잘못된 셈이다.

코뿔소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아종(亞種)들 이름에도 적용된다. 코뿔소는 흰코뿔소, 검은코뿔소를 포함해 다섯 아종이 있다. 아종에 관계없이 모든 코뿔소는 회색이다. 다만 좀 더 진한 회색을 띤 아종이 검은코뿔소다. 며칠 전 54세 최고령으로 숨을 거두어 화제가 된 흰코뿔소 역시 흰색이 아니라 회색이다. ‘넓다’는 뜻의 아프리칸스어 ‘weit’를 유럽인들이 ‘white’로 잘못 알아듣는 바람에 그런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2마리의 암컷 북부 흰 코뿔소인 나진(오른쪽)과 딸 파투가 지난 2018년 3월 케냐 레이키피아 국립공원 내 올 페제타(Ol Pejeta) 자연보호구역에서 풀을 뜯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최근 홍남기 기재부 장관이 가계 부채의 심각성을 얘기하면서 ‘회색 코뿔소’를 언급해 주목받았다. 회색 코뿔소(gray rhino)는 세계정책연구소 대표 미셸 부커가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언급한 이후 널리 회자되는 용어다. 초식동물인 코뿔소는 평상시엔 풀이나 얌전히 뜯어먹고 또 한 덩치 하는 만큼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만 유지한다면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오판한다. 그러나 막상 코뿔소가 돌진해오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간과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하는 용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전혀 예상치 못한 위험의 습격을 뜻하는 ‘블랙 스완’이 위명을 떨친 후 이에 대칭되는 위험을 강조해 만든 조어다. 까만 고니가 희귀한 데 반해 코뿔소는 모두 회색이다 보니 알고도 당하는 위험의 습격을 상징한다.

최근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는 가계 부채 증가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 마침내 금융위원회가 ‘총량 규제’라는 칼을 뽑았다. 가계 부채 증가야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지만 금융위원회, 특히 새로 부임한 위원장은 회색 코뿔소와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것 같다. 필자 역시 이러한 견해에 동감한다. 현재 우리나라 가계 부채는 2분기 기준 GDP의 105.6%로 마의 100%를 돌파했다. 여기에 전세금이나 월세 보증금이라는 그림자 대출을 포함할 경우 가계 부채 총량은 대략 150%에 다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국 중 최고 수준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가계 부채 증가의 주요 원인은 지난 4년간 지속된 부동산 가격 폭등이다.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서울의 기준 소득 대비 주택 가격 비율(PIR)은 15.6이다. 쉽게 말해 15.6년 동안 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서울에서 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주요 도시 중 홍콩 다음으로 높은 수치로, 뉴욕이나 런던에 비해 월등히 높다.

그렇다 보니 작금의 가계 대출 총량 규제의 궁극적 목표가 가계 부채 관리 그 자체인지 집값을 잡겠다는 건지 헷갈린다. 집값을 잡는 데 목표가 있다면 금융위 처지에서는 억지로 끌려온 측면이 있다. 부동산 시장의 주무 부처는 어디까지나 국토교통부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이 치솟자 정치권은 엉뚱하게 한국은행에 비난 화살을 퍼부었다. 결국 지난 8월 한은은 ‘금융 불균형 해소’라는 명목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자산 버블 파이터’로 등판했다. 그리고 이번엔 금융위가 끌려온 셈이다. 속된 말로 ‘X 싼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는’ 격이다. 금융위 역시 잘못하면 한국은행이 당하는 것처럼 온갖 덤터기를 쓸 수 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총량 규제라는 극약 처방이 필요할 만큼 심각한 상황까지 다다른 건 맞는다. 그런데 규제안이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인지 좀 거칠게 만들어진 측면이 있다. 전세 대출이나 주택 매입 잔금은 처음부터 열어둬야 했다. 즉 명확히 실수요라고 판단되는 대출은 열어두고 투기 수요뿐 아니라 수요의 성격이 명확지 않은 회색 대출까지는 규제한다는 방침을 정한 후 이를 토대로 최소 증가율을 추정하는, 좀 더 정교한 보텀 업(bottom-up) 접근이 필요했다. 또한 금융권 대출을 봉쇄할 경우 전세를 통한 주택 매입 자금 조달이 더 유리하게 되어 갭 투자가 활성화될 우려가 있다. 아마 금융위가 애초 전세 대출을 규제한 데에는 이러한 고충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부분까지 조이는 것은 무리다.

마지막으로 정책의 성공은 신뢰에 있다. 애초 올해 증가율을 6%로 설정했지만 일부 실수요를 수용하다 보니 이미 7%를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만큼 실수요를 감안할 경우 내년 4% 증가율이란 목표가 달성 가능한 수치인지 면밀한 분석을 통해 필요하면 상향 조정도 고려하기 바란다. 코뿔소가 돌진해 오면 직선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피할 수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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