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집값과의 전쟁' 고의로 패배했나

최규민 기자 입력 2021. 10. 23. 03:04 수정 2021. 10. 23.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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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올릴 정책만 쓰면서 5년 내내 집값과의 전쟁
무능인지 고의인지 해명이라도 듣고 싶다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가 너무 처참하다 보니 항간에 “정부가 일부러 부동산 가격을 올린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온다. 이를테면 ‘집값 전쟁 고의 패배설’이다. 이 음모론은 ‘빵점 천재설’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다. 정부는 출범 이후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부동산 정책을 냈다. 너무 많아 다들 헷갈릴 지경이라 누구는 28번이라고 하고, 누구는 36번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그 많은 정책을 낼 때마다 어김없이 집값이 올랐다. 4지선다 시험에서 대충 찍어도 25점은 맞는다. 빵점을 맞으려면 사실 모든 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36번 정책을 내서 매번 실패하려면 정책이 불러올 결과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아파트단지와 주택가가 보이고 있다. 2021.10.15.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과 참모들이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몸소 체험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고의 패배설’은 더 그럴싸해진다.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가격이 오르자 집값을 잡겠다며 이른바 ‘버블 세븐’ 지역 주민들을 투기꾼 취급하고, 대출을 조이고, 세금 폭탄을 때렸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가격이 오르자 집값을 잡겠다며 모든 주택 구매자를 투기꾼 취급하고, 대출을 더 세게 조이고, 더 강한 세금 폭탄을 때렸다. 아인슈타인은 “광기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같은 정책을 쓰면서 반대의 결과를 바랐다면 정신이 나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일부러 집값을 올렸다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다.

정부가 5년 내내 ‘집값 괴물’을 잡겠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무기 두 개는 끝내 숨겼다는 사실도 고의 패배설에 힘을 싣는다. 집값이 뛸 때 다른 나라들이 가장 먼저 꺼내드는 수요 억제책은 외국인 또는 비거주자에 대한 규제다. 홍콩과 싱가포르, 캐나다 토론토는 외국인이 주거용 부동산을 매입할 때 15~20% 세금을 추가로 매긴다. 호주는 당국 승인을 받아야 외국인이 집을 살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이미 지어진 집은 안 되고 신축 주택만 살 수 있다. 어찌 된 일인지 한국 정부는 자국민이 집 사는 건 필사적으로 막으면서도 외국인들이 출처 모를 돈으로 서울과 부산의 아파트를 쇼핑하며 가격 올리는 건 방치했다.

집값이 뛸 때 수요 억제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공급 확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최근 한 택지에 집 한 채만 지을 수 있도록 돼 있는 법을 바꿔 4층짜리 아파트를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이 법 개정 하나로 향후 몇 년간 71만4000채의 주택이 새로 공급될 길이 열렸다. 주택 소유주들의 거센 반발을 뚫고 법안을 통과시킨 민주당 소속 주지사와 의원들은 “더 많은 집을 짓는 일을 우리는 너무나 오래 미뤄왔다”고 반성했다. 한국 정부는 “집값 상승은 투기꾼과 저금리 때문”이라며 신규든 기존 주택이든 시장에 공급될 수 있는 통로를 꽁꽁 틀어막아 놨다. 마치 운명의 축구 한·일전에 나서면서 손흥민과 김민재를 벤치에 앉히고 경기하는 꼴이다. 이쯤 되면 집값과의 전쟁에서 이길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할 법도 하다.

하지만 이 정부가 고의로 집값을 올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민심 이반과 정권 교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일부러 집값을 올리고 국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을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의 패배설을 믿는 사람이 적지 않은 건 불과 4년 만에 서울 아파트 가격이 93% 올랐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임기가 끝나기 전 한 번이라도 정말 왜 그랬는지 대통령에게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다. 그게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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