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기타의 神' 에릭 클랩턴이 '느린 손'으로 불린 진짜 이유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입력 2021. 10. 23. 03:03 수정 2021. 10. 2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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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순탁의 당신이 몰랐던 팝]
6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클랩턴
연주를 느리게 해서 '슬로 핸드'?
196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에릭 클랩턴은 '기타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전기 기타 역사에서 클랩턴만큼 후대에 미친 영향력이 거대한 존재는 찾아보기 어렵다./조선일보DB

‘기타’ 하면 떠오르는 연주자가 몇 있다. 에릭 클랩턴(76)이 그 중 하나다. 그는 196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해 “클랩턴은 신(God)이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불과 스물세 살 때 일이었다. 후대에 미친 영향력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지미 헨드릭스 정도를 제외한다면 전기 기타의 역사에서 에릭 클랩턴보다 거대한 존재는 없다.

우리가 아는 에릭 클랩턴의 히트곡은 무진장이다. 일일이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지면의 반 이상은 너끈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직한 필자다. 그런 추악한 방식으로 나 자신을 호도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에릭 클랩턴은 위대한 기타리스트이자 탁월한 작곡자였다. 또한 괜찮은 보컬리스트이기도 했다.

그의 커리어에는 언제나 블루스가 있었다. 블루스는 기본적으로 흑인 음악이다.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온 흑인 노예들이 미국 남부 목화밭에서 일하면서 부르던 음악이 블루스였다. 이후 이 블루스가 대도시 시카고로 건너가면서 전기 기타를 만나 ‘리듬 앤드 블루스’가 되고, 컨트리와 결합한 뒤에는 명칭이 자연스럽게 바뀐다. 우리가 ‘로큰롤’이라고 정의하는 바로 그 음악이다.

에릭 클랩턴은 블루스 순수주의자였다. 그가 처음 주목받은 계기 역시 블루스 록 밴드 야드버즈(Yardbirds)를 통해서였다.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그가 야드버즈를 탈퇴한 이유 역시 블루스 때문이었다는 거다. 야드버즈가 점점 ‘팝’으로 변해가는 데 염증을 느낀 에릭 클랩턴은 밴드 하나를 더 거친 뒤 1966년 록 3인조 크림(Cream)을 결성한다.

크림은 대중음악 역사상 처음 등장한 ‘수퍼그룹’으로 인정받는다. 당대 최고 연주자가 한데 모였다는 이유에서였다. 에릭 클랩턴 외에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 드러머 진저 베이커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 셋이 연출한 무대는 1960년대 음악계에 전례 없는 충격을 던졌다. 그 중에서도 마치 재즈처럼 즉흥 연주를 10분 넘게 이어가는 방식은 기왕의 록에는 없던 새로운 도전이었다. 실제로 드러머 진저 베이커는 스스로를 록 아닌 재즈 드러머로 규정했다.

당시 크림의 대표곡으로는 다음 세 곡을 꼽을 수 있다. 발매 순서대로 ‘선샤인 오브 유어 러브(Sunshine of Your Love·1967년)’, ‘화이트 룸(White Room·1968년)’, 그리고 ‘크로스로드(Crossroads·1968년)’다. ‘크로스로드’는 블루스 고전을 커버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뿌리를 알 수 있는 곡이었다. ‘선샤인 오브 유어 러브’는 창작이었지만 진득한 블루스를 전면에 내세워 격찬을 이끌어냈다. 마지막으로 ‘화이트 룸’은 블루스에 바탕을 두되 여기에 사이키델릭과 하드 록을 섞어 입체적인 사운드를 일궈낸 곡이었다. 2019년에는 영화 ‘조커’에 배경음악으로 쓰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세 곡의 공통점도 물론 있었다. 당시 평범한 연주자는 꿈도 꾸기 어려울 만큼 기술적이면서도 강렬한 연주를 들려줬다는 거다. 이게 바로 핵심이다. 우리는 보통 에릭 클랩턴을 ‘슬로 핸드(Slow Hand)’라고 부른다. 한데 위의 세 곡만 감상해봐도 우리는 그의 연주가 전혀 ‘슬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시는 얼마든지 더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많은 수가 ‘레일라(Layla)’라는 곡, 알고 있을 것이다. 에릭 클랩턴이 데릭 앤드 더 도미노스(Derek & The Dominos) 시절인 1970년에 발표한 곡이다. 들어보면 이 곡 역시 조금도 ‘슬로’ 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에릭 클랩턴을 ‘슬로 핸드’라고 불렀다. 슬로 핸드는 1977년 발매한 에릭 클랩턴의 솔로 앨범 타이틀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적어본다. 에릭 클랩턴이 슬로 핸드라고 불린 건 연주를 느리게(slow) 해서가 아니었다. 정말이다. 에릭 클랩턴이 직접 쓴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가 슬로 핸드라는 별명을 얻게 된 건 야드버즈 시절이었다. 에릭 클랩턴은 공연 도중 기타 줄이 끊어지면 연주를 중단하고 기타 줄을 무대 위에서 교체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간이 꽤 소요되자 관객석에서 다 같이 박수를 천천히 치기 시작했다. 요컨대 “공연 다시 시작해달라”는 무언(無言)의 요청이었던 셈이다.

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이걸 ‘슬로 핸드클랩(박수)’이라고 부른다. 이 광경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던 동료 연주자가 이후 에릭 클랩턴을 ‘슬로 핸드’라고 놀리기 시작한 것이다. 즉, 슬로 핸드는 연주 속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별명이다. 차라리 기타 줄 가는 게 너무 느려서 붙었다고 보는 게 맞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슬로 핸드’가 잘못된 뜻으로 통했을까. ‘원더풀 투나잇(Wonderful Tonight)’이나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 ‘렛 잇 그로(Let It Grow)’처럼 유독 템포가 느리고 유장한 분위기의 곡이 사랑받았기 때문이었을 확률이 높다. 일종의 근거 없는 뇌피셜(뇌+official을 합쳐 만든 신조어로 개인적인 생각이란 뜻)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에릭 클랩턴은 이 별명을 꽤나 선호했다. 이후 아예 음반 제목으로 내건 이유이기도 하다. 자서전을 보면 미국 관객이 특히 슬로 핸드라는 수식을 애정했다고 한다. 웨스턴 무비에 등장하는 총잡이 같은 인상을 줬기 때문인 듯하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 적어도 이건 뇌피셜이 아니다. 신뢰해도 좋을 본인피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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