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가 왜 섹스리스냐고? 번아웃됐기 때문

양지호 기자 2021. 10. 2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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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들

앤 헬렌 피터슨 지음|박다솜 옮김|RHK|400쪽|1만8000원

“점심으로 커피 한 잔.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본다. 수면 부족은 당신이 택한 약이다. 당신은 해내는 사람(doer)이니까.”

2017년 미국 서비스 대행 앱 ‘피버’(fiverr)는 수척하고 퀭한 눈빛의 여성 사진 위에 이런 광고 문구를 적어 넣었다. 힘들어도 ‘노오력’하라는 미국판 메시지였다. 그러나 광고와 달리 미국 ‘요즘 애들’은 해내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책 ‘요즘 애들’(RHK)은 이들이 번아웃(burnout)됐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제목은 ‘요즘 애들’이지만 내용은 ‘애들’만이 아니다. “번아웃은 일시적 증상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상태다”라는 저자의 진단은 세대(밀레니얼)와 미국이라는 특정 국가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텍사스대 미디어학 박사 학위를 받고 버즈피드 기자로 활동했던 저자는 번아웃에 빠진 미국 밀레니얼(1981~1996년생)의 초상을 그렸지만, 그 모습은 지금 한국에서 아등바등하는 20~50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잠을 줄여 공부했고, 잠을 줄여 일한다. 입시의 ‘4당 5락’이 새벽 기상의 자기 계발 ‘미라클 모닝’으로 옷을 갈아입은 한국과 무엇이 다른가.

번아웃은 그저 탈진된 상태가 아니다. “탈진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번아웃은 그 상태로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몇 년 동안 더 나아가라고 스스로 몰아붙이는 걸 의미한다.” 번아웃에 빠지는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간단하다. 힘을 모두 쏟아내고도 계속 전진해야 한다는 초조한 강박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부모의 철저한 양육법에 따라 좋은 대학에 가서 학위를 따기 위해 노력했고,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무급 인턴을 마다치 않았지만 약속됐던 ‘안정감’은 찾아오지 않았다. 좋은 일자리는 사라지고, 아무리 일해도 나아질 것이란 기대는 가지기 어렵다.

‘일과 삶을 동일시하라’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서사는 이들을 극한으로 내몬다. “이 방정식은 애초에 번아웃으로 가는 직행열차인 일과 삶의 통합을 전제로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해라. 그러면 평생 하루도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구분도 경계도 없이 매 순간 등골이 빠지도록 일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를 ‘과로 문화’라는 미국적 컬트(사이비 종교)라고 꼬집는다.

이제는 휴식도 어렵다. 소셜미디어는 끊임없이 사용자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않은지’ ‘남들은 얼마나 멋지게 사는지’를 상기시키며 휴식을 방해한다. 일을 쉬는 것도 간단치 않다. 모두가 극한으로 쥐어짜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번아웃을 해결해 보려는 시도는 곧 남의 번아웃을 유발한다는 의미”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이들에게는 출산은커녕 데이트도 언감생심이다. “우리가 섹스를 덜 하는 건 섹스를 덜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점심으로 커피 한 잔.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본다. 수면부족은 당신이 택한 약이다. 당신은 해내는 사람(doer)이니까.” 2017년 미국 서비스 대행 앱 피버(한국으로 치면 ‘숨고’ 같은)는 수척하고 퀭한 눈빛의 여성 사진 위에 이런 광고 문구를 적어 넣었다. 힘들어도 ‘노오력’하라는 미국판 메시지였다. /fiverr

미국의 MZ세대는 평균 3만7000달러(약 4000만원)가 넘는 학자금 대출을 안은 채로 베이비붐 세대 부모가 당연한 듯 요구했던 좋은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번아웃에 빠진다. 사회는 이들에게 꼬리표를 붙인다. ‘나약하다’ ‘게으르고 이기적이다’ ‘멘털이 약하다’ ‘요즘 것들이란’ 등등. 저자는 반박한다. “누군가 밀레니얼이 게으르다고 말하면,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어떤 밀레니얼이요? 우리는 대학이 중산층 직업으로 가는 길이라고 배웠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는 열정이 이윤으로, 혹은 적어도 우리를 가치 있게 여길 만한 안정적 일자리로 이끌어 줄 거라고 배웠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밀레니얼 세대의 위기가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지적과 이들이 각성해야 한다는 대안은 크게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이들이 번아웃에 빠지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번아웃은 필연이라는 주장에 설득된다.

간혹 베이비붐 세대를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한다’며 비판하기도 하지만, 세대 간 갈등을 조장하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한다는 것도 장점이다. 원제 Can’t Even.

☞번아웃

극심한 신체·정신적 피로 속에 무기력감과 자신감 결여를 느끼는 상태. 저자는 ‘탈진 상태에서도 더 나아가라고 스스로 몰아붙이는 것’을 번아웃이라고 한다. 책은 밀레니얼은 ‘열심히 일하면 보상받는다’는 믿음을 잃어버리면서 번아웃에 빠진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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