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과 부츠는 원래 남자의 자부심이었다

곽아람 기자 2021. 10. 23.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남성 복식의 상징 '부츠', 청년 된 기념으로 선물하기도
승마용 남성 신발이던 하이힐, 17세기 초반 여성 패션으로 수용
스니커즈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고무로 만든 방수 신발서 유래

신발, 스타일의 문화사

엘리자베스 세멀핵 지음|황희경 옮김|아날로그|448쪽|2만8000원

한정판 수집 열풍이 불고 있는 스니커즈(고무창 운동화)는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숲에 살던 원주민이 고무나무 수액을 추출해 만들어 신던 방수 신발에서 유래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밑창에 장착된 캡슐화된 공기가 완충재 역할을 하도록 설계된 나이키의 ‘에어 조던’(1984). 마이클 조던은 이 신발을 NBA의 복장 통일 규정을 어기면서 코트에 신고 나갔고 나이키는 기꺼이 벌금을 지불했다. 이 과정을 통해 ‘에어 조던’은 미국이 중시하는 개인주의 가치의 상징물로 자리 잡았지만 값비싼 운동화가 탐난 빈민가 흑인 소년들을 범죄로 이끌어, ’(사람) 죽이는 신상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자동차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프라다의 이브닝 샌들(위). 아래는 오리지널 에어 조던. /아날로그

캐나다 토론토의 바타 신발 박물관 수석 큐레이터인 저자는 “신발은 성별을 표시하고 층위를 표명하며 지위를 선언하고 저항을 표현하는 데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샌들, 부츠, 하이힐, 스니커즈 등 네 가지 유형 신발의 역사를 짚으며 문화사적 의미를 밝혀낸다.

“꽉 끼는 신발보다는 모카신(굽 낮은 인디언 신발)이나 샌들, 아니면 아예 맨발이 더 낫다.”

자연에 순응하는 소박한 생활을 강조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1850년 4월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도 출토된 샌들은 19세기에 ‘저항의 신발’로 여겨졌다. 발가락을 드러내는 샌들을 신는다는 것은 주류 사회를 거부한다는 의지의 표명과 동의어였다. 노예해방론자와 여권 운동가들은 샌들을 신은 로마시대 ‘자유의 여신’ 리베르타스의 이미지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에드워드 카펜터는 “신발은 ‘발을 위한 관’”이라면서 “민주주의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미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구원하는 것처럼, 샌들을 신어 발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신체에서 가장 멸시받는 부위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주당 노동시간이 축소되고, 장기 실업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지역 해변이나 공영 수영장 등 돈이 많이 들지 않는 곳에서 여가를 보낼 것이 장려되자 활동하기 편한 샌들이 대유행했다. 1950년대 들어 여성들을 위한 하이힐 샌들이 이브닝웨어로 인기를 끌면서, 적어도 여성 패션에서 샌들은 ‘격식 있고 품위 있는 신발’의 범주로 받아들여졌다. 1953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대관식에서 로저 비비에가 만든 금빛 샌들을 신고 발가락을 드러낸 채 왕좌에 올랐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1회에서 신민아가 해변에서 잃어버리는 신발이 로저 비비에 제품이다.

1973년 캐나다에서 제작된 록스타풍의 남성용 부츠. 1970년대 몇몇 남성은 록스타들의 뒤를 이어 무릎까지 올라오는 화려한 부츠를 받아들였다. /아날로그

부츠는 고대에도 있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남성 복식의 ‘자부심’이 되었다. “남자다움을 보여주는 여러 입고 걸치는 물건들이 있겠지만 부츠만큼 그것을 신은 남자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물건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소년들은 종종 어른이 되었다는 표시로 첫 부츠를 선물받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스타킹을 신고 입는 반바지와 화려한 버클로 여미는 구두는 귀족의 무절제 및 나약한 남성성을 연상시키게 됐다. 반대급부로 부츠와 함께 판탈롱(통 좁은 남성용 바지)이 유행했다. 1970년대 데이비드 보위를 비롯한 록스타들은 높은 굽이 달린 무릎 높이 부츠를 신고 역동성을 뽐냈다. 반면 여성의 부츠는 ‘발에 신는 코르셋’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발목의 결점을 감추거나 각선미를 돋보이게 하는 섹슈얼한 아이템으로 사용됐다. 영화 ‘귀여운 여인’ 홍보물에 줄리아 로버츠가 허벅지까지 오는 번쩍이는 검정 비닐 부츠를 신고 등장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170여 장의 신발 사진만으로도 보는 즐거움이 있는 책. 저자의 맛깔나는 해설을 따라가다보면 신명나게 책장이 넘어간다. 여기서 퀴즈 하나. ‘유리 구두’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샤를 페로의 동화 ‘신데렐라’는 왜 17세기 말에 탄생했을까? 저자는 “하이힐은 원래 특권층 남성들이 신던 승마용 신발이었는데, 17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여성복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하이힐이 여성들에게 매력적인 액세서리로 여겨진 것은 비실용성 때문이 아니라 ‘승마와 남성성’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 1618년 영국의 궁정 신부(神父)는 런던 주재 베네치아 대사에게 이렇게 탄식했다. “요즘 여자들은 모두 남자 신발을 신고 있어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