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대통령 쇼가 먼저인가

유지한 기자 입력 2021. 10. 2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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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 5시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누리호가 우주로 발사된 이후 연구진들과 취재진들은 분석 데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사는 예정대로 진행됐지만 로켓에 실린 위성 모사체가 목표로 한 700㎞ 궤도에 제대로 올랐는지 확인하기 위한 데이터였다. 예정된 5시 50분이 지나고도 결과가 나오지 않자 프레스센터 분위기는 술렁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오후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KSLV-2)'의 발사 참관을 마치고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 발사통제동에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2021.10.21/연합뉴스

그러던 중 문재인 대통령이 6시 10분쯤 나로우주센터 발사통제동에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발사통제동은 프레스센터에서 2㎞ 정도 떨어져 있어 기자들도 TV를 통해 생중계를 지켜봤다. 누리호를 개발한 과학자들보다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발표에 나서자 프레스센터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TV 속 문재인 대통령은 ‘누리호 발사 쇼’의 주인공이었다. 문 대통령은 박수를 받으며 연단 위에 올랐다. 그 뒤로는 누리호 개발의 주역인 고정환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발사체개발본부장을 비롯해 11년 7개월 동안 누리호를 개발해온 과학자들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그렇게 연설 10여 분 동안 과학자들은 꼼짝도 않고 대통령 뒤를 지켰다. 한 참석자는 “연설이 끝나고도 30~40분은 더 서 있었던 것 같다”며 “시험 성패를 떠나서 과학자들이 피땀 흘려 이룬 성과를 보여주는 자리가 쇼가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항우연의 한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과학자들이 대통령 뒤에 서 있던 건 애초 계획에 없었지만 갑자기 요청을 받아 부랴부랴 결정된 것이었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이번 누리호 행사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누리호 개발에 참여한 한 박사는 “TV로 발사 과정을 지켜봤던 국민들에게 그 결과를 알려주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아니냐”며 “정치 쇼를 꼭 해야 하나”라고 말했다.

대통령 연설로부터 1시간 뒤인 7시에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이 열렸다. 모두가 궁금해하던 위성 모사체가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이유가 한 시간이나 뒤에서야 발표된 것이다. 대통령이 행사장을 떠나고 나서야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누리호 개발자들이 프레스센터에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도 과학자들은 뒷전이었다. 약 10분간 임 장관이 누리호의 비행에 대해 설명했다. 임 장관은 기술적인 질문은 받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한 뒤 자리를 금방 떠났다. 항우연 내부에서도 “자료만 그냥 읽는 장관이 왜 브리핑하느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질문 시간이 돌아오자 그제야 과학자들이 마이크 앞에 설 수 있었다. 고정환 본부장은 마지막 한마디를 자처하며 “너무 아쉬운 결과다. 다음에는 반드시 완벽한 결과를 보여 드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완벽한 성공을 하지 못한 과학자들은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박수를 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통령과 장관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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