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공존으로 스웨덴 기틀 세운 오뚝이 총리 팔메

채인택 2021. 10. 2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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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로프 팔메
울로프 팔메
헨리크 베리그렌 지음
조행복 옮김
아카넷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국가 스웨덴의 정치와 사회 시스템을 말할 때 울로프 팔메(1927~86)를 빼놓을 수 없다. 관용과 포용, 그리고 공존의 평화국가이자 복지사회를 이룬 정치인이자 총리라는 말로 팔메를 다 표현할 수도 없다. 스웨덴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지은이는 인간 팔메를 입체적으로 분석해 한 인물의 성장과 성숙, 그리고 꿈과 희망을 두툼한 책에서 재현한다.

정치인 팔메는 오뚝이였다. 69년 10월부터 76년 10월까지 7년간 총리를 지낸 뒤 총선 패배로 사회민주당의 44년 연속 집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그는 6년간 와신상담한 뒤 82년 10월 총리에 복귀하면서 좌파를 살려냈다.

부활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팔메가 생활 정치인이라는 데 눈길이 간다. 좌파 지도자지만, 이념이 아닌 구체적인 삶에 도움이 되며, 국민이 원하는 살가운 정책으로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특징은 학생운동을 펼쳤던 대학 시절에도 드러난다. 그가 52년 위원장을 맡은 스웨덴학생회연맹은 시민당 정권과 협력해 대학개혁에 앞장섰다. 넓은 사회계층이 누릴 더 나은 교육과 더 많은 학생 주택, 그리고 학생의 경제적·사회적 조건 개선을 지향했다.

1969년 스웨덴 총리로 임명된 직후 근대적 타운하우스 앞에서 가족과 함께 한 팔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비교된다. [사진 아카넷]
특히 학자금 대출 대신 학업 수당을 요구했다. 학생들이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국가장학금이었다. 대학생의 절반가량이 돈을 빌려 생활하고, 졸업 뒤에도 채무에 허덕이는 시대를 생활 정책으로 끝내려고 했다. 이를 통해 ‘기울어진 충원’, 즉 가난한 집안 출신을 포함해 폭넓은 계층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시도했다. 이념과 실질을 결합한 이런 정책은 팔메의 상징이 됐다.

팔메는 실천하는 글로벌 시민이었다.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글로벌 상황을 파악하고 국제연대를 외쳤다. 학생회연맹 회장 시절 인도·미얀마·인도네시아 등 넓은 세계를 직접 다니며 제3세계와 교류·연대를 강화했다. 현지 학생들과 토론과 대화하며 3세계의 실상을 파악하고 문제 해결 방안을 함께 고민했다. 이는 그가 냉전시대 중립국 스웨덴의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에게 할 말을 다하면서 국제적인 진영정치를 거부하는 자산이 됐다.

팔메는 줄서기를 강요하는 국제사회에서 진영이 아닌 인도주의와 평화주의를 앞세우며 대화와 공존을 주장하는 정치인이 됐다. 인간의 권리를 억압하는 전 세계 군사정권과 독재정권에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팔메를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팔메는 진영논리를 배척한 평화와 공존의 활동가였다. 서방 지도자 중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했으며, 미국과 쿠바를 화해시키려고 시도했다. 중립국 스웨덴이라서가 아니라 평화주의자 팔메라서 가능했던 시도였다.

팔메는 당시 세계를 양분하던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을 다한 용기 있는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벌어진 ‘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누르자 격렬히 항의했다. 좌우 이념의 틀이 아닌 인도주의적·평화주의적 원칙에 따라 움직였기에 가능했다.

72년엔 미국이 북베트남 수도 하노이를 폭격하자 격노는 이럴 때 하는 것이란 걸 만천하에 보여줬다. 팔메는 민간인 거주 도시 폭격을 유럽에서 20세기에 벌어진 인류에 대한 범죄들과 동일 선상에 놓았다. 37년 1600여 명의 민간인을 숨지게 한 나치 콘도르 의용병의 스페인 게르니카 민간인 폭격, 40년 소련이 폴란드군 장교 2만여 명을 집단 처형한 카틴 학살, 41년 나치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에서 3만여 명을 살해한 바비야르 학살에 비유했다. 무고한 주민의 목숨을 앗아간 이런 끔찍한 일이 다시는 벌어져선 안 된다고 외쳤다. 흑백 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로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도 팔메의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팔메는 유엔군축위원회 창설을 이끌어 다자평화외교의 씨앗을 뿌렸다. 그러면서 제3세계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에 앞장서서 국제사회에서 이를 부자나라들의 당연한 의무로 정착시켰다.

그런 팔메지만 최후는 안타까웠다. 86년 수도 스톡홀름의 거리에서 한 남자가 쏜 권총 두 발을 맞고 숨졌다. 범인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심장 고동과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팔메의 삶을 기록했다. 누군가 이렇게 기록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정치인도 함부로 말하거나 은밀하게 행동하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모두가 잘사는 나라’와 ‘평화로운 국제사회’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팔메처럼 말이 아닌 실천의 정치인이 그리운 계절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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