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을 내려놓고 부려놓은 고백들 [책과 삶]

임지영 기자 2021. 10. 2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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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기
황정은 지음
창비 | 204쪽 | 1만4000원

호수공원이 내려다보이는 파주 어딘가에서 동거인과 기거하며 4월엔 토요일마다 목포행 열차에 몸을 싣는 여자 사람. ‘일기’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그냥 시민1, 행인1, 독자1로 살며, 살아가며 써 내려간 황정은의 첫 산문집이다.

코로나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에게도 비자발적 은둔을 선물했다. 선이 아닌 점이 돼버린 일상. 다행히 새로 얻은 집 주변에 공원이 있었고, 디스크 환자이기도 한 그는 일부러 먼 길을 택해 걷고 또 걸었다. 원고료와 인세 수입보다 중한 건 ‘정좌를 유지할 수 있는 근력’이라 말하는 그는 운동을 이렇게 권한다. “운동을 하고 아픈 것이 운동하지 않고 아픈 것보다는 개운하게 아프거든요.”

창작의 무게를 내려놓고 편하게 썼다지만 글 곳곳에선 고백의 무게도 만만치 않았음이 읽힌다. 자신들의 불행을 주입했던 부모, 성적 호기심을 채우려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준 사촌오빠. 피붙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했던 고통들에게 그는 안녕을 고한다. “ ‘내 잘못이 아니란 걸 알았다면.’ 어떤 사람들에겐 결코 심상할 수 없고 평범할 수 없으며 지나가는 말이 될 수 없는 말. 그 말을 읽은 덕분에 나는 이 글을 썼다. 그리고 굳이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 수치심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목포행은 세월호 참사 이후 생긴 습관이다. 그곳에서 먹고 자는 것으로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

한낮의 햇빛을 피해 창 안쪽에 앉아 그는 생각한다. ‘30년 전의 나는 이날 오후를 몰랐고, 이런 마음을 몰랐고, 이들이 내 삶에 도래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여기서 이들은 그의 조카를 비롯한 소중한 사람들이다. 구름 뒤엔 햇살이 있다. 그래서 미래가 궁금하지 않아도 내일이 살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임지영 기자 iimi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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