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된 자아는 그저 복사판일 뿐..여친의 '본체'를 그리워하며 펼치는 멋진 상상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이종산 소설가 입력 2021. 10. 22.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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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유미의 연인
이서영

넷플릭스 <블랙미러> 시리즈의 시즌3 네 번째 에피소드 ‘샌주니페로’는 2017년 에미상(Emmy Award)에서 TV영화 작품상과 미니시리즈 드라마 스페셜 부문 각본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진 작품이다. ‘샌주니페로’에는 ‘마인드 업로딩’ 개념이 나오는데, 이는 인간의 정신이 뇌에 담겼다고 믿는 이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다. 기존에 인간이 영혼이라고 믿었던 것은 실은 뇌에 저장된 일종의 메모리이고, 그렇다면 인간의 뇌를 정보화해서 클라우드에 백업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SF 소설가의 공상에 불과한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이것을 실제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있다고 한다. 김초엽의 단편소설 ‘관내분실’도 마인드 업로딩이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이야기다. 또 개인적으로 이 시대 최고의 SF 드라마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어즈 앤 이어즈>에도 마인드 업로딩이 아주 중요한 순간에 나온다.

‘유미의 연인’은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개념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질문을 전면에 내세우고 탐구하는 단편 소설이다. ‘복제된 자아를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물론 이 질문에 앞서 ‘그게 정말 될까?’를 더 먼저 떠올리겠지만, 이것은 SF 속 모든 소재에 공통되는 질문이라 뒤로 미뤄두기로 한다.)

우주비행사 유미는 우주에 나가기 전에 마인드 업로딩을 한 뒤 임무를 완수하러 떠난다. 그냥 우주에서 영상통화를 하면 안 되냐고? 영화 <인터스텔라>를 본 사람이라면 우주를 떠돌면서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이 자신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늙어가는 걸 본다는 게 얼마나 환장할 일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불상사(지독한 향수병)를 막기 위해 우주비행사들은 영상통화 대신 마인드 업로딩을 택했다.

그런데 남겨진 사람들은 어쩌나. 유미의 남자친구이자 동거인이었던 정훈은 복제된 유미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미의 지인들은 내키면 언제든 어떤 공간으로 가서 홀로그램으로 된 유미를 보면서 복제된 유미의 ‘마인드’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마인드 업로딩은 한 개인의 기억은 물론 사고체계까지 복사한 것이라 복제된 유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유미와 대화를 나누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차이가 있다. 몸까지 복제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만질 수도 없고, 포옹할 수도 없다. 스킨십만의 문제도 아니다. 정훈에게 복제된 유미는 자신이 사랑하던 그 유미와 절대 같을 수 없다. 이것이 이 소설의 결론이었다면 난 그리 큰 인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미의 연인’은 그런 단순한 결론을 뛰어넘는다. 정훈은 복사된 유미를 거부하지만 결국은 그리움 때문에 유미 복사판을 자꾸 찾아간다. 정훈은 유미와 같은 기억과 사고체계를 가진 유미 복사판과 대화를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지만, 유미 복사판은 유미의 완벽한 대체재가 되지 못한다. 정훈이 유미의 복사판과 하는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는 유미 본체다. 유미 본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언제 돌아올까?

정훈은 유미 복사판을 종종 찾아가 대화를 나누면서 유미 본체를 기다린다.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정훈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내가 경탄하게 되는 것은 ‘유미의 연인’에 깔린 태도다. ‘복사된 자아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니지. 하지만 그럼 뭐 어때?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한데?’ 복사된 자아는 물론 우리 자신 그 자체는 아니다. 세월이 흐르며 정훈의 육체는 노쇠한다. 그러나 마인드 업로딩이 있는 이상 육체의 끝은 정신의 죽음이 아니다. 놀랍게도 정훈은 유미 복사판과 의논 끝에 자신도 마인드 업로딩을 해서 자신의 데이터와 유미 복사판의 데이터를 통합하기로 한다. 통합된 데이터는 우주로 전송되어 유미 본체를 만나러 떠난다.

‘유미의 연인’은 인간이 마인드 업로딩 기술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를 탐구하는 일종의 상상 실험으로 보이기도 한다. 완벽한 마인드 업로딩이 가능하다면, 두 개의 자아를 통합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그런데 그게 가능하다면, 두 개의 자아만이 아니라 몇백 명의 자아를 통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집단지성이라는 말은 지금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끔찍하게 느껴진다면, 1818년에 세상에 나온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려 보자.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인류는 프랑켄슈타인 비슷한 것을 실제로 만들 수도 있는 기술을 갖게 되었지만, 프랑켄슈타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는 않다. 어쩌면 SF는 남들보다 앞질러 미래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유미의 연인’처럼 두려움을 훌쩍 뛰어넘어 경쾌한 상상을 펼칠 수도 있다. 너의 자아와 나의 자아가 통합되어 우주로 날아가는 것 같은 그런 멋진 상상을 말이다.

이종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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