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X》 번역 후 40년..인생 4막 열어젖힌 명의

오종탁 기자 2021. 10. 2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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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떠난 유방암 최고 권위자 양정현 교수, 1차 병원서 다시 환자들 만난다
"국립의료원·삼성서울병원·건국대병원 경험 더 가까이서, 쉽게 전하고 싶어"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시사저널과 인터뷰 중인 외과의사 양정현 ⓒ시사저널 최준필

"사람들은 의사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과 의술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의사의 인간적인 한계도 알아야 한다." 

한 미국 의사가 1965년 '닥터 X'란 필명으로 쓴 에세이 《인턴 X》는 16년 뒤 국내에 번역 출간(김영사)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7년 재출간됐고, 지금도 수많은 의학도의 '정신적 교과서'로 꼽힌다. 

닥터 X는 인턴 생활 1년 동안 그때그때 녹음한 자료를 바탕으로 의사란 직업에 대해 고찰했다. 《인턴 X》를 한글로 번역한 이도 의사다. 국내 독자들이 닥터 X의 분노, 실망, 우울, 인간미, 뜨거운 가슴, 용기 등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던 데는 '의사 번역자'의 공이 컸다. 

군의관 시절 《인턴 X》 번역 

다음 달이면 《인턴 X》가 국내에 소개된 지 꼭 40년째다. 40년 새 책값은 3800원에서 1만3800원으로 올랐다. 30대 육군 군의관이었던 번역자는 70대 외과 명의(名醫)가 됐다. 우리나라 의료 수준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인턴 X》 번역 출간 이후 의학 소설, 드라마, 영화 등도 급격히 늘었다. 

번역자 양정현 필메디스내과의원 유방암센터장(73)은 번역 제의를 받았을 때 원서의 '더 맨 오브 더 스팟(THE MAN OF THE SPOT)'이란 표현부터 눈에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의사를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최전선에서 질병과 싸우고 있는 현장인(現場人)'으로 정의한 것에 크게 공감한 것이다. 

양 센터장은 "의사는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자 자랑스럽고 위대한 직업이지만, 사회 발달에 따라 의사도 결국 인간 그 이상이 될 순 없다는 명백한 논리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시기와 불신의 대상이 되어 무더기로 매도당하는가 하면 한 명의 실수가 모든 의사의 잘못인 양 여겨질 때도 있다"며 "의사도 인간이라는 사실 앞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보면 그도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인간적 욕망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인턴 X》 번역 과정이 "언제부터인가 진부한 의사의 굴레를 쓰고 있던 내게 인턴·레지던트 시절을 일깨워주고 의사로서의 인생을 더욱 진지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케 하는 무서운 채찍이 됐다"고 했다. 

이렇게 사명감과 자부심을 벼린 양 센터장은 실제로 닥터 X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의사 생활을 이어왔다. 소령으로 예편한 양 센터장은 1982년부터 1994년까지 국립의료원,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삼성서울병원, 2011년부터 올해 8월까지 건국대병원에 몸담았다. 그가 무혈수술센터장, 암센터장, 진료부원장, 외과 과장 등을 역임하는 동안 삼성서울병원은 국내 최고 병원으로 우뚝 섰다. 건국대병원은 양 센터장을 유방암센터장으로 스카우트해 의료원장, 의무부총장 등 중책도 맡겼다. 그의 재직 기간 건국대병원은 3차례 연속 상급종합병원 인증에 성공하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 

'닥터 X'처럼…40년간 사명감 놓지 않아 

양 센터장이 유방암 치료법 진보에 기여한 공로도 지대하다. 그는 초기 유방암에 대한 '침 정위 생검'(1986년)과 겨드랑이 부위에 내시경을 넣어 수술하는 '겨드랑이 임파절 내시경 수술'(1994년)을 국내 최초로 시행했다. 1996년엔 '감시림프절 생검'을 도입해 환자들의 통증과 후유증을 크게 줄였다. 

2007년 양 센터장이 주축이 돼 발족시킨 세계유방암학술대회(GBCC)는 아시아 최고의 유방암 학회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과거와 달리) 미국 등 해외로 나가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충분히 유방암을 치료할 수 있게 됐다"며 "전 세계가 우리나라의 유방암 연구 내지 치료 수준을 공인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국내 유방암 환자 평균 생존률(10년 기준)은 현재 80%에 이른다.

의학도들에게 '정신적 교과서'로 꼽히는 《인턴 X》(김영사) ⓒ시사저널

양 센터장은 지난주부터 서울 서초구 필메디스내과의원에서 의사 인생 4막을 열어젖혔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주치의, 연세대 의료원장 겸 의무부총장 출신인 정남식 대표원장(70)이 이끄는 병원이다. 양 센터장과 정 원장은 각각 유방암, 심혈관 질환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의사로 이름을 떨쳤다. 의사, 의료 행정가로 최정점을 찍은 두 사람은 은퇴 대신 또다시 환자를 택했다. 1차 병원에서 환자들과 보다 가까이 마주하며 의사 생활 말년을 꽃피우는 중이다. 

1차 병원에서 의사 인생 4막 

양 센터장은 환자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와 사랑으로도 익히 알려져 있다. 2018년 12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의사는 가끔 본인이 시혜(施惠)한다는 식으로 진료와 환자 등을 대할 수 있는데, 그런 자세가 안 되도록 자꾸 채찍질할 필요가 있다"면서 "환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소홀했다간 큰코다친다. 환자를 스승이라 생각하고 모셔야 한다"고 말했다. 또 "환자마다 의사와 충분히 얘기하고 싶을 텐데, 밖에도 같은 심정의 환자들이 대기한다"며 "물리적으로 1명 당 2~3분밖에 못 보고 짧게 몇 마디만 말하려니 미안할 따름"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당신도 암을 이길 수 있습니다-여성을 위한 암 상식》(1991년), 《옷 갈아입는 의사》(1994년), 《유방과 사랑에 빠진 남자》(2002년), 《유방암, 진료실에서 못다한 이야기》(2010년) 《"나, 유방암이래"》 등 유방암 환자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주고 의사와 환자간 이해를 도모하는 저서도 다수 펴냈다. 

양 센터장은 "건국대병원을 나오면서 담당했던 환자들이 많이 아쉬워했고, 일부는 울기도 했다. '웬만큼 의사 생활을 했으니 앞으로 편하게 지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가게 된 이유"라며 "대학병원에서처럼 쉴 새 없이 진료와 수술을 반복하진 못하겠으나, 환자들과 더 쉽게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에 1차 병원으로 왔다"고 전했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나의 경험과 노하우를 여기서 아낌없이 풀어내고 싶다"고 덧붙였다. 

《인턴 X》 저자 닥터 X는 책의 성공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신상을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는 《인턴 X》를 집필한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일반인들이 의사라는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직업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적었다. 《인턴 X》가 세상에 나온 지 56년이 흘렀다. 닥터 X는 과연 알까. 멀리 한국에서 번역자가 그의 정신을 고스란히 반영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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