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지역 송파·마포에 불꺼진 임대 주택들, 왜?
20일 오후 11시, 서울 마포구 공덕동 인근의 만리재로. 광화문·여의도와 가까워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인기 지역으로 오피스텔·주택이 밀집한 1.5㎞ 구간에 유독 컴컴한 주택이 하나 보였다. 주변 주택들은 저녁이 되자 거주자들이 속속 귀가하며 불이 환하게 들어왔는데, 이 18층짜리 건물만은 밤 늦게까지 불 켜진 집이 9곳에 불과했다.
이 건물은 작년 초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들인 신혼부부 임대주택이다. 정부가 도시 근로자의 월 평균 소득 120% 이하 부부에게, 주변 시세의 60~80% 수준으로 저렴하게 임대해준다. 거주 기간은 최대 6년, 자녀가 있으면 최대 10년까지다. 집값이 치솟은 서울 마포에서 파격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이 주택의 37호(戶) 중 절반에 가까운 16호는 1년째 공실(空室)이다.
정부가 도심의 오피스텔⋅다가구주택을 사들여 청년⋅신혼부부 등에게 싸게 공급하는 ‘공공임대주택’을 외면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국민의힘 송언석 의원실에 따르면, 이 같은 매입임대주택 중 6개월 이상 빈집으로 방치된 공가(空家)는 올 6월 기준 전국에 5785호였다. 2017년(1822호)의 3배 이상으로 늘었다. 공가율도 같은 기간 2.2%에서 4%로 증가했다.
수요자들은 “정부가 서민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우선 전세가 없고 10평 내외의 작은 집에 다달이 수십만 원의 월세, 관리비를 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내년 5월 결혼을 앞둔 유현우(26)씨는 서울 송파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헬리오시티’ 인근에 LH가 공급하는 4층짜리 신축 빌라를 발견했지만 보증금 2억5000만원에 월세 27만원이 마음에 걸려 결국 입주를 포기했다. 유씨는 “당장 한두 푼이 아까운 사회 초년생 입장에서 매달 임대료를 낸다는 게 가장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LH가 올 2월 사들인 이 빌라는 전체 36호 가운데 22호(61%)가 8개월째 공실이다. LH 관계자는 “수선 유지비 등 운영 비용이 들기 때문에 전세 공급은 쉽지 않다”고 했다.
분양 면적이 작은 것도 수요자들의 외면을 받는 이유다. 서울 신월동의 한 청년 임대주택은 17㎡(약 5평)에 불과하다 보니 1년째 입주자가 한 명도 없다. 서울 공덕동의 신혼부부 임대주택 입주를 포기했다는 이은재(35)씨는 “신혼부부 임대주택이라고 해서 갔더니 전용면적 29㎡(8.7평)짜리더라”며 “아이도 있는데 집이 생각보다 작게 나와 입주를 포기했다”고 했다. 그는 결국 서대문구 북가좌동에 있는 18평짜리 빌라에 1억8000만원을 주고 전세로 들어갔다.
LH는 수시로 다가구주택, 오피스텔 등을 매입해 1년에 3~4차례 입주 공고를 내지만, 정작 방문해 집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건물, 주방, 화장실 사진 정도가 제공되는 게 전부다. LH 관계자는 “전국 수백 채 건물을 공급하다 보니 건물마다 인력을 두기가 어렵다”며 “일단 신청을 해서 입주 대상자로 뽑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집을 보여준다”고 했다.
결로⋅누수 등 하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입주자들도 있다. 작년 6월 강동구의 한 주택에 입주한 직장인 박모(30)씨는 “겨울에 결로 현상 때문에 물이 줄줄 흘러 창틀에까지 고였다”며 “벽지나 실리콘 마무리도 엉성하고, 화장실은 청소할 때마다 시멘트 덩어리가 깨져 나오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런 하자는 일반 주택에서도 종종 나오지만, LH가 처음부터 부실한 주택을 산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실제로 LH 인천지역본부의 주택 매입 담당 부장은 지난해 부동산 브로커에게 양주 등 접대를 받고, 주택 30여 채를 매입한 사실이 드러나 최근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LH 임대주택 입주자의 보수 요청은 2016년 6만5753건에서 지난해 13만2594건으로, 4년 새 배로 뛰었다.
올 6월 기준 전국 매입임대주택은 14만4393호로, 정부는 올해 작년 대비 60% 이상 많은 총 4만5000호를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LH 측은 “수요자가 선호하는 지역에 양질의 주택을 확보하고, 장기 공실은 입주 조건을 완화하는 등 공가율을 낮추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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