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잔인했는데..피비린내 나는 한국 드라마에 열광한 이유

김유태 입력 2021. 10. 22. 17:45 수정 2021. 10. 22.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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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D.P. 이어 오징어게임
가학적 콘텐츠 대박 난 이유
세계인들, 선명한 폭력보며
불평등·불합리에 함께 분노
승자가 존재하는 게임 통해
현실서 못 이루는 대리만족
전쟁터 속 패자 내려다보며
'난 아니다' 안도감 느끼기도
사물로 전락한 약자보며
한편은 분노, 한편은 연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패자가 흘리는 피의 행진을 지켜봐야 하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청자가 1억4200만명을 넘었다. 외신에 따르면 '오징어 게임'을 최종 화까지 정주행한 시청자는 8700만명이다. "영화는 사회의 거울이며, 한 사회의 집합적 멘탈리티는 시각적 및 서사적 모티프의 인기에서 드러난다"는 20세기 철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영화이론에 기댄다면 '오징어 게임'의 벼락같은 흥행에는 세계인의 잠재의식이 내재돼 있다.

군무이탈자 체포전담조를 소재 삼은 드라마 'D.P.'와 조선시대 아포칼립스 '킹덤' 시리즈까지 시선을 확대하면 세 드라마에는 각각 탈락자, 탈영병, 탈인간(좀비) 등 배제된 약자를 향한 가학성(加虐性)이 공통분모로 발견된다. 왜 한국인과 세계인은 가학성을 전진 배치한 콘텐츠에 열광할까. '가학성'을 키워드로 평론가들의 도움을 받아 넷플릭스 세 드라마의 흥행 저변에 감춰진 시청자 심리 요인을 분석했다.

현실 세계에선 보이지 않던 억압 구조가 드라마에선 선명하다는 점이 첫 번째 흥행 요인으로 꼽힌다.

'오징어 게임'의 프런트맨은 참가자에게 가해진 폭력이 합의된 규칙에 의한 결과임을 설명한다. 그러나 극을 보는 시청자들은 유년 시절의 놀이 규칙으로 단순화된 '폭력의 구조'가 불공정한 질서의 파생품임을 간파해낸다. 군대 내부의 폭력이 외부 현실의 압축판임을 드러내는 'D.P.', 권력자에 의해 좀비로 전락하는 백성을 그린 '킹덤'에서도 시청자는 부조리의 속살을 발견한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세 드라마 모두 이 시대의 폭력성을 여과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고 총평하면서 "'오징어 게임'엔 자본의 노예로서 게임판의 말을 자처한 인간이 등장하고, 'D.P' 또한 군대라는 특수한 계급사회가 만들어낸 폭력들을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킹덤'에서 무서운 건 좀비 자체보다 신분사회를 지탱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했다.

불평등 심화로 절대다수가 패자가 된 시대적 심리도 '오징어 게임'의 전례 없는 흥행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드라마에서 생존 게임은 '어쨌든' 승자가 정해지는 결말을 향한다. '오징어 게임' 기훈·상우·새벽 가운데 반드시 한 명은 456억원을 거머쥐고, '킹덤'에서 후계를 다투는 세자 이창과 조학주 대감도 결국 역병을 잠재우고 권력을 손에 쥘 결말이 예정돼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사진 제공 = 넷플릭스]
허구의 쟁투 앞에서 시청자들은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연세대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백문임 교수는 "'오징어 게임' 참가자는 낙오자가 아니라 승자가 될 수도 있다는 데 전생의 도박을 건다"며 "이 시스템은 낙오자에게 가혹하지만, 그들이 참여하는 이유는 모두가 낙오자가 될 수도 있는 현실과 달리 어쨌든 승자가 존재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넷플릭스 드라마가 '사태의 본질'을 바라보기에 기존 매체보다 비교우위에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실재하는 살인을 쓴 기사보다 영상화된 가상 살인에서 피 냄새가 짙다는 설명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는 "잘 다듬어진 드라마의 시청자는 끔찍한 폭력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자각을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약육강식의 전쟁터를 바라보면서 시청자는 심리적으로 '기형적인 안도감'을 느낀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시청자들은 세 드라마의 약자들을 '내려다보는' 위치를 점유한다. 라이터로 달군 바늘로 달고나에 금을 긋는 미끄럼틀 아래와 황금가면을 쓴 VIP들의 관람실을 경계 없이 드나드는 '오징어 게임'의 시청자는 457번째 참가자다. 군부대 창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위수지역을 이탈한 탈영병 행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D.P.'의 최상위 감시자도 바로 시청자다.

이병철 문학평론가는 특히 '오징어 게임'을 두고 "시청자는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나타난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해 그들을 응원하며 그들의 생존과 대비되는 탈락자의 죽음에는 무신경해진다"면서 "시청자는 정작 자신이 가면을 쓰고 게임을 내려다보는 VIP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시청자들은 가학 행위의 최단 거리에 밀접해 있지만 피학의 대상으로 내몰릴 위험이 원천적으로 제거된 상태란 얘기다.

세 드라마의 약자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신체가 훼손된다. 잘리거나 불태워지는 '킹덤' 지율헌의 선한 백성 좀비, 코 고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방독면을 써야 했던 최준목 일병 등 'D.P.' 속 탈영병, 전직 의사였던 111번 참가자의 메스에 안구와 장기를 적출당하는 '오징어 게임' 사체는 모두 인간보다 사물에 가깝다. 사물화된 약자를 향한 가학을 다룬 서사는 현실 세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밈(인터넷 유행 행동 모방)과 패러디물 등 '재미'로 용해된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시청자들은 '게임'을 지켜보는 사람, 어쩌면 일종의 VIP로서 지위가 부여돼 있기 때문에 이 드라마를 오락적으로 소비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라며 "각종 밈이나 패러디물이 쏟아져나오는 현상을 생각해보면 '오징어 게임'은 하나의 현상이고, 대중은 '오징어 게임' 캐릭터를 상당히 즐기고 있다. 가학성에 대한 공포는 이미 사라져버렸다"고 덧붙였다.

가학의 대상을 설정하는 폭력의 논리가 비합리적이라면 시청자의 징벌 욕망이 작동한다고 평론가들은 봤다.

'킹덤'에서 역병의 원흉을 밝히려 언골 절벽을 오르는 선량한 의녀 서비를 시청자들은 응원한다. '오징어 게임'에선 배신하는 이성을 상징하는 상우보다 기훈과 '깐부'를 맺고 구슬을 건네는 일남의 웃음에 매료된다. 치매로 투병하는 조모를 보호하기 위해 용역 깡패가 된 탈영병을 일부러 놔주는 'D.P.' 한호열 상병도 마찬가지다.

반면 '킹덤'의 해원 조씨 일가, 육체적 힘으로 살해를 도모하는 '오징어 게임' 장덕수, 진실한 사과 없이 전역하는 'D.P.' 황장수 병장을 징벌하는 장면에서 시청자는 쾌감을 느낀다.

정여울 문학평론가는 "'D.P.'는 가학의 피해자 입장에서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작가의 시선이 살아 있다"며 "또 한호열 상병과 안준호 이병의 우정이 커가는 과정은 곧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자라나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오징어 게임' 알리 압둘 역에 대한 시청자들의 옹호, 그러나 알리를 속여 죽음으로 내몬 상우의 비인간성에 관한 질타는 결국 불합리한 논리에 분개하는 시청자 심리를 대변한다고 전문가는 봤다.

이병철 문학평론가는 "선의를 베푼 조상우와 대결할 수 없다는 이유로 '형이랑 하기 싫다'며 게임을 거부하는 알리의 믿음에 시청자들은 감정을 깊이 이입한다"면서 "가학과 피학의 양면성, 내가 살려면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섬뜩한 사실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오징어 게임'의 성취도는 세 드라마 중 가장 크다"고 평가했다.

'D.P.'의 악인 황장수 병장이 가학의 주체이자 자본주의 시스템의 피해자라는 양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 평론가는 "동료 병사를 괴롭히고 갑질을 일삼은 황장수 병장이 제대 후엔 편의점 주인에게 온갖 멸시를 받는 아르바이트생이란 점은 특기할 만하다"며 "가학을 표현하는 인물이 또 다른 가학의 피해 대상일 수도 있다는 점을 'D.P.'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킹덤' 'D.P.' '오징어 게임'에서 나타난 가학성 묘사가 후속 드라마에서도 현실 폭력을 구조화하는 유의미한 장치로 이어질지는 여전한 과제다.

공개 사흘 만에 넷플릭스 한국 1위, 세계 4위를 기록 중인 드라마 '마이 네임'은 철창 안에서 벌어지는 생존 오디션, 신체 절단 등 가학성을 스토리의 주요 소재로 삼았고, 오는 11월 19일 공개될 배우 유아인 주연의 드라마 '지옥'도 비현실의 광기와 폭력을 보여줄 예정이다.

정 평론가는 "인간의 가학성에 관해선 묘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묘사의 경계 자체가 허물어지는 느낌이 있다. 이는 우려스러운 부분이기도 하다"며 "하지만 앞선 세 드라마는 이전의 콘텐츠를 뛰어넘는 면이 분명히 있다. 후속 드라마들이 그려낼 폭력의 당위성에 대해선 시청자의 고민이 함께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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