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외치던 지식인이 부역자로.. 中, 그들 없인 '홍콩 개조' 못했다"

이철민 선임기자 입력 2021. 10. 22. 16:48 수정 2021. 10. 24.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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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주간지 뉴요커 분석
"민주화 세력, 갑자기 정치적 기억상실증"

2017년 홍콩 정부(행정청)의 노동복지부 장관이 된 로치퀑(羅致光‧67). 영국 킹스칼리지와 미국 UCLA에서 공부한 그는 최대 야당이었던 민주당 의원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법치의 옹호자였다. 1989년 텐안먼 광장 학살 때에는 중국 정부를 강력히 규탄했었다. 그러나 지난 5월 홍콩 시내 빅토리아 공원에서 열린 시민들의 텐안먼 유혈 진압 규탄 시위를 “불법은 불법”이라고 비판했다. 2019년 민주화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경찰이 최루탄 가스를 쐈을 때에는 “최루탄 가스보다 바비큐 연기를 더 걱정하라”고 했다.

중국 정부의 1989년 텐안먼 학살 32주년을 맞아, 지난 5월27일 홍콩 빅토리아파크에서 열린 홍콩 시민들의 촛불 시위./Hong Kong Free Press

홍콩 행정청의 선임고문인 올해 71세의 로니통(湯家驊). 중도‧진보 성향의 민주당에 몸담고 2003년 중국 정부가 강요하던 보안법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그는 지금 이 법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다. 작년 1월 중국 정부가 우회적으로 이 국가보안법을 도입하자, 적극적으로 해외 언론과 인터뷰에 응하며 “이 법에 따른 대량 검거도 없었고, 언론 폐쇄도 없었다”고 그 당위성을 강조했다. 지난 1월 한때 그도 속했던 범(汎)민주진영 인사 53명이 무더기로 체포됐고, 지난 6월엔 최대 일간지 빈과일보가 폐간됐다.

미 주간지 뉴요커는 20일 “관리‧정치인‧평론가 등 홍콩 지식인층의 부역자들(collaborators)들의 적극적인 동조가 없었으면 중국이 홍콩을 자기 뜻대로 두들겨 ‘개조’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1989년 중국 정부의 텐안먼 시위 유혈 진압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려 홍콩대학 캠퍼스에 설치된 '수치의 기둥(Pillar of Shame)' 기념물을 지난 6월 한 학생이 닦고 있다. 홍콩 대학 측은 지난 8일 '안전성'을 이유로 이 상징물의 철거를 결정했다./로이터 연합뉴스

이들은 한때 텐안먼 학살과 보안법 도입을 반대하고 대의제 확산을 외쳤다. 그러나 이제는 수정주의적 역사관과 이중 잣대, ‘미국이나 잘하라’식의 비판을 앞세우며 홍콩 시민들에게 “결코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다”고 설득한다. “시의원(입법회 의원) 수가 적어야 더 민주적”이고, 시민 단체들이 계속 폐쇄되는데도 “홍콩 시민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있다”고 말한다. 뉴요커는 “민주화를 외쳤던 이들이 갑자기 ‘정치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하다”며 “이런 지배층이 없었더라면, 중국 정부가 홍콩을 억압적으로 굴복시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중국 공산당의 부역자들은 자녀들은 사립학교에 보내고, 자신들은 해외 대학의 이사로 있다. 중국 공산당의 ‘애국 교육’을 강조하면서, 가족들은 홍콩 내정(內政)에 간섭한다는 나라들에 거주한다.

1997년 중국에 주권이 이양됐을 때의 홍콩도 완벽한 민주주의 정체(政體)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법체계가 강력했고, 표현의 자유가 확실했다. 많은 홍콩 지도자들은 해외에서 교육받았고, 열린사회에서 국제적 유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홍콩은 그 엘리트들과 정치인들이 탄압에 기꺼이 동조하면, 굳이 ‘폭력적 혁명’이 없이도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현재 홍콩에선 오직 중국 정부가 판단한 ‘애국자’만 선거에 나설 수 있다. 23만3000명이었던 선거인단(선거위원회) 수는 4800여명으로 줄었다. 절반이었던 입법회(시의회)의 직접 선출 의석은 오는 12월 선거에선 5분의1로 줄었다. 민주 정당들은 아직 후보도 못 냈다. 미국 워싱턴 DC 소재 윌슨 센터의 글로벌 연구원인 마이클 데이비스는 “사회가 독재적 정권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조심하라’는 것이 홍콩의 교훈”이라고 뉴요커에 말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다른 지식인들에게 “법을 왜곡하고 헌법(1997년 영국과 중국이 합의한 기본법)을 파괴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세련된 법률 용어로 말할 수 있는 교양 있는 지식인들이 필요했다. 미국의 언론인 앤 애플바움은 “홍콩엔 이런 지식인이 넘쳐났다”고 말했다.

영국 런던대와 호주국립대에서 공부한 탐이우청(譚耀宗‧71)은 원래 친중(親中)적이었지만, 텐안먼 학살에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홍콩 경찰의 극렬한 민주화 시위 탄압을 지지한다. 그는 “1989년에는 텐안먼 사태의 전모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영국에서 기숙학교를 나와 런던정치경제대학(LSE)를 졸업한 홀든 초우(42)는 애초 중국 공산당과 홍콩 사이에 ‘교량’이 되겠다던 친중 인사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북쪽 수뇌부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홍콩의 미국 영사관 밖 시위를 주도한다. 누구든 중국을 거스르는 자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공격한다. 그는 “2014년, 2019년과 같이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오지 않으려면, 애국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미국 주간지 뉴요커가 중국 공산당에 동조해, '홍콩 개조'에 적극 가담한 대표적인 엘리트 정치인들로 꼽은 로치퀑, 로니통, 홀든 초우, 탐이우청(왼쪽 상단에서 시계방향 순)./위키피디어

왜 이들은 중국의 홍콩 개조에 적극 뛰어든 것일까. 뉴요커는 “이들에게는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과 투옥, 해외 망명 후 민주화 운동, 홍콩 잔류 뒤 정치 포기의 세 갈래 길이 있었지만 어느 것도 매력적이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 선택인 ‘노예적 굴종(servility)’을 택했다”고 분석했다.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연구한 호주 그리피스대의 정치학자 리 모건베서는 “홍콩 지배층은 혜택과 두려움, 무시당함의 세 가지 요인을 생각했을 것”이라며 “공모(共謀)할 경우 따르는 일자리의 안정성과 혜택, 정치를 떠나 사업을 해도 중국에 충성하지 않는 한 순탄하지 않을 현실을 고려했을 때 그들은 생존과 생계를 위해 정치적 바람에 따라 굽히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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