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조 금융이 만들어내는 집단지성의 힘

한겨레 2021. 10. 22. 14:5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문진수의 사회적 금융 이야기]
미국 뉴욕시 저소득층 거주지역의 지역밀착신협(CDCU) 활동을 소개하는 누리집(lespeoples.org)

‘보조금 24’라는 누리집이 있다. 국가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금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온라인 전용 창구다. 개인이 받을 수 있는 정부 보조금 수는 300개가 넘는데, 중앙·지방정부가 발주하는 공공사업에도 이런저런 명목의 지원금이 붙는다.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일이니만큼 사업 참여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경제 기업이 국가의 보조금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는 건 좋은 일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지원 자격만 갖추면 보조금도 받고 새로운 사업 기회도 얻으며, 부족한 운영자금을 메울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경제 기업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독성이 강한 탓에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정당한 절차와 방법으로 기회를 얻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가 될까? 본인들이 만든 상품과 서비스로 고객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고, 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에 안주하려는 관성이 생기는 게 문제다. 근육을 단련하지 않고 운동 경기에서 계속 좋은 성적을 거둘 수는 없다.

지난 몇 년 사이 공공과 민간 영역에 사회적 경제 기업과 소셜 벤처를 지원하는 제도와 기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돈은 당사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막혔던 현금 흐름을 풀어주는 열쇠로, 기업의 성장을 견인하는 촉매제로 기능했을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지원금으로 인해 근육량이 줄어드는 퇴보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보조금과 금융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거나 투자를 받으면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책임 의식과 상환 의지는 기업을 성장시키는 거름이 된다.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기업이 얻을 수 없는 튼튼한 근육을 만들어 준다. 무리한 욕심으로 과다한 부채를 짊어지는 건 잘못이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금융을 적절히 활용하는 건 기업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정부의 지원금은 상수가 아니다. 정치적 환경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외부의 지원 없이 작동되는 자조·연대기금이 필요한 이유다. 자신들의 힘으로 일구어낸 것보다 단단한 건 없다. 하지만 구성원들 다수가 취지와 목적에 동의하더라도, 돈을 모으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왜 그럴까?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절실하지 않고, 더 편한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무담보 소액대출(마이크로크래딧) 사업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 모델은 집단대출 방식으로 운영된다. 돈은 개인에게 빌려주지만, 상환 책임은 집단(5인)이 함께 책임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덮어놓고 돈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 책임이라는 방식이 주는 유대와 긴장감을 통해 구성원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되도록 한 것이다.

자조·연대기금은 단순한 돈뭉치가 아니다. 어려운 가운데 각자 힘들게 번 돈을 모아 기금을 만들면 공동체 식구들 사이에 책임감과 동료애가 높아진다. 소중하게 만든 돈이니만큼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생각, 다른 구성원들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된다는 의식, 기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경험과 지혜가 축적되어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 만들어진다.

미국의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서 일하는 지역밀착 금융기관들(CDFIs)의 고객은 신용점수가 바닥인 사람들이 대다수다. 주류 금융회사들이 애지중지하는 신용평가 방식으로 보면, 절대로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회수율은 경이로운 수준이다. 이유가 뭘까? 집단지성에 의한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소중하면 아끼게 되고, 잘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긴다.

금융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해치는 흉기가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방패가 될 수도 있다. 정치가 싫다고 외면하면 시민들의 삶이 위험해지듯, 금융이 어렵다고 멀리하면 돈에 끌려다니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자조 금융이 필요한 이유다. 파란 약을 먹을지, 빨간 약을 먹을지의 선택은 공동체와 구성원들의 몫이다.

문진수 사회적금융연구원장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