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 덮쳐올 때, 함께 걸어보라..정용준 새 소설집 '선릉 산책'

선명수 기자 2021. 10. 2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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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선릉 산책

정용준 지음|문학동네|272쪽|1만4000원

소설가 정용준의 세 번째 소설집 <선릉 산책>은 상실 이후의 시간을 견디며 비로소 서로의 슬픔을 마주하기 시작한 이들의 동행을 담담한 시선으로 그린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소설가 정용준의 세 번째 소설집 <선릉 산책>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사람들은 해답 없는 문제를 고민하며 함께 걷기도 하고, 앞서간 타인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포개며 홀로 걷기도 한다. 저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거나 실패한 자국을 지닌 사람들, 그 이후의 무력감과 피로감 속에서도 서로의 발자국을 가만히 바라보는 이들의 동행을 소설은 담담하게 그려보인다.

2019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한 단편 ‘사라지는 것들’ 역시 상실이 할퀴고 지나간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만 살기로 했어.” 어느날 엄마가 아들에게 말한다. 화자인 아들 ‘성수’는 교통사고로 세 살 어린 딸을 잃었다. 그 후 아내와 이혼했고, 회사를 그만뒀으며, 새로 시작한 사업도 전망 없이 막막하기만 하다. 그런 자신에게 ‘그만 살겠다’고 선언한 것이 엄마라는 사실이 잔인하고 또 짜증날 뿐이다. 화가 치솟아 아들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퍼부어 봤지만 엄마는 담담하게 말한다. 그저 고단하고, 너무 피곤하다고.

딸의 사고 이후 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도, 타인의 마음을 묻지도 않는다. 사고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건 “다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느닷없이 찾아온 것은 이제 생을 마감하겠다는 엄마의 선언이다. 아들은 연애시절 아내가 자주 불렀던,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노래 속 ‘두려워하는 건 반드시 찾아와’라는 가사와 멜로디를 떠올린다. “안다. 마음먹은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못 먹게 했어야지. 먹은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소설은 폭탄과 같은 엄마의 선언 후, 두 모자가 즉흥적으로 강화도로 동행하게 되는 어느 겨울날을 그린다. 모자의 여행은 엄마가 보여준 책자 속 하이쿠의 한 구절처럼 숨바꼭질 같은 느낌이다. “겨울 칩거/ 처에게도 자식에게도/ 숨바꼭질.” 도통 어떤 마음인지 알기 힘든 엄마와의 대화는 결국 ‘그날’의 이야기를 향해 간다. 물어보지 않았고, 또 물어볼 수도 없었던 시간들 속에서 딸의 사고 현장에 있었던 엄마는 손녀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긴 채 살아왔으며, 그 절망과 고통이 짙은 피로감과 무력감으로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들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던 ‘두려워하는 건 반드시 찾아와’의 다음 가사를 알게 된다. “이제야 모든 걸 알겠냐고 묻곤 하지.”

소설은 손쉬운 회복이나 화해를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흔들흔들 걷는 엄마가 찍어놓은 발자국에 발을 포개어” 걸어가는 동행에서 인물들은 서로의 슬픔에 조금씩 다가가게 된다. 소설 말미, 홀로 택시에 올라타 아이처럼 웃으며 손을 흔드는 엄마와 마주 손을 흔드는 아들의 모습이 작별의 인사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또 다른 단편 ‘미스터 심플’에서도 각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만나 함께 걷는다. 화자가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클래식 기타를 구매하기 위해 만난 판매자의 아이디는 ‘미스터 심플’이다. 한때 호른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던 그는 해고와 이혼, 사업 실패를 잇따라 겪고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자신의 지난 역사와도 같은 악기와 음반들을 처분하고 있다.

출판사 일을 하는 화자는 이 남자와의 만남 뒤 자서전을 쓰고 있다는 남자의 부탁으로 그의 습작을 봐주게 되고, 그가 살아온 삶과 함께 남자의 호른 연주도 듣게 된다. 그리고 남자의 원래 아이디는 ‘미스터 심플’이 아니라 ‘미스터 슬픔’이었다는 것, “내 이름을 슬픔입니다” “한때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하는 음악가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등의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은 상실 이후 하루하루를 견뎌가고 있는 두 사람이 동행하며,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면서 묻어뒀던 자신의 슬픔 역시 들여다보게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2016년 젊은작가상,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표제작 ‘선릉 산책’도 두 사람의 짧은 동행을 그린다. 소설은 스무 살 자폐성향의 청년 ‘한두운’과 그를 돌보는 일당 아르바이트에 나선 청년 ‘나’의 하루 동안의 산책 이야기다. 높은 시급의 알바를 놓칠 수 없어 가지 않는 시간을 지루하게 버티던 와중 한두운은 선릉 숲의 나무 이름들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하고, ‘나’는 서서히 한두운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한두운과 한나절을 함께하며 ‘나’는 그의 자해방지용 헤드기어와 무거운 책가방을 벗겨주고, 그에게 놀라운 암기력과 권투 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보호자에게 추가로 3시간을 더 돌봐달라는 연락이 오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소설은 두 사람의 하루 동안의 동행을 통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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