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 금지'는 神이 열매독성 자연이치 알려준 것.. 인간이 法이라 믿어

기자 2021. 10. 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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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젤 피터 작품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24) 神의 법, 어떻게 이해할까

단순한 벼락으로 생긴 사고를 ‘악행에 대한 벌’이라고 상상하듯… 자연의 원인·결과 잘 모르는 인간이 가공하고 꾸며내

神은 금지한 게 없어… 신체 본성 거스르는 과욕·정신의 법칙 어기는 비합리적 생각으로 스스로 부자유스럽게 만들어

신의 법이 어떤 것인지, 그 법을 인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의 문제는 고대부터 사람들을 사로잡아 왔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은 신의 뜻, 즉 신의 법을 존중하고 따르려 한다. 도대체 신의 법의 정체는 무엇일까? 신이 알려준 가장 유명한 법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기’, 3장 17절) 이 법이 오늘 우리가 여러 관점에서 숙고해볼 대상이다. ‘성서’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라 해도 좋을 이 ‘선악과’ 이야기는 겉모습은 명료하고 단순하지만 속은 깊어 수많은 사색의 원천이 됐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에서 과일을 먹지 말라는 이 금령(禁令)은 불안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금령은 아담에게서 불안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금령은 아담에게서 자유의 가능성을 일깨워놓기 때문이다. …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다. … 다만 ‘할 수 있음’의 가능성만이… 불안의 어떤 높은 표현으로 현전(現前)할 뿐이다.”(임규정 역)

아담은 무엇이 불안한 걸까? 바로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이 불안하다. 아담은 자신이 자유로운 자라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금지의 법이 그에게 자유를 알려줬다. 더 정확히는 금지와 더불어 아담의 자유가 탄생했다. 아담의 자유란 무엇인가? 금지의 명령은 아담이 그 명령을 거스를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자라는 것을 알려온다. 아담이 자유로운 자가 아니었다면 금지 역시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법은 자유로운 자만을 금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과 함께 그 법을 어길 수도 있는 자유가 함께 탄생하며 이 자유는 불안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은 우리 일상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새해 첫날 같은 때 자신에 대해 금연이나 금주 같은 법을 세운다. 그러곤 금방 불안에 빠진다. 자신이 그 금령을 안 지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안이란 바로 법을 안 지킬 수도 있는 자신의 자유에 대한 정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자유가 너무 무거워 그것을 귀찮게 여기기도 한다. 자유의 무거움을 잘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키르케고르가 숙고했던 ‘아브라함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의 명령(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지자 그는 불안에 휩싸인다. “키르케고르가 아브라함의 불안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 불안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한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그에게 와서 너는 아브라함이니 너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한 것이 정말 천사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각자는 이렇게 자문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것이 정말 천사일까? 내가 정말 아브라함일까? 무엇이 내게 이것을 증명할 것인가? … 결국 나는 나 자신을 납득시킬 만한 그 어떤 증거나 징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어떤 음성이 나에게 전해진다면, 이때 그 음성이 천사의 목소리라고 결정할 사람은 언제나 나 자신입니다.”(박정태 역)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법이 주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자유를 체험한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은 정말 심각한 것이어서 그에 대해 숙고하고 또 숙고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는 아들을 제물로 바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그 전에 자신에게 찾아온 천사가 진짜 천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가짜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가 들은 명령이 진짜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이었다고 믿을 수도 있고, 나이가 너무 많아 환청을 들은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아브라함에게 이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 자신 외에는 누구도 이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정을 도와주지 못한다. 자신이 들은 것이 진짜 신의 명령이었는지 아니면 환청이었는지 조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오로지 아브라함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결정의 자유는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그러나 신의 법, 신의 명령은 저 무거운 자유와 더불어서만 인간에게 찾아온다. 자유가 있기에 명령을 어기는 것에 대한 책임, 죄에 대한 책임 역시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법 앞에 단독으로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신은 정말 군주처럼 명령하는 자일까? 스피노자 역시 과일을 따 먹지 말라는 신의 법에 대해 사색한 철학자다. 스피노자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담에게 명한 금지는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아담이 과일을 먹으면 죽을 것이라는 신의 계시가 그 금지의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력이 독(毒)은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이근세 역) 무슨 뜻인가?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관한 책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쓰고 있다. “신은 아무것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신은 ‘그 열매는 그 구성 때문에 아담의 신체를 해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아담에게 인식시킨다. 열매는 비소(砒素)처럼 작용한다. … 나쁜 것은 중독, 소화불량으로 이해돼야 한다.”(박기순 역) 과일을 먹지 말라는 신의 법은 금지의 명령처럼 들리지만, 실은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자연법칙에 대한 묘사다. 열매는 풋과일이라서, 또는 아담에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아담의 신체에 해가 된다는 것을 신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자연법칙과 동일한 이 신의 법을 일종의 도덕적 명령으로 오해한다. “신은 그에게 단지 과일의 섭취가 낳을 자연적 귀결을 드러냈을 뿐인데, 아담은 원인들을 모르기 때문에 신이 자신에게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금지한다고 믿는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즉 자연법칙을 구성하는 원인과 결과를 잘 파악하지 못할 때 인간은 상상력을 동원해 가공의 원인을 꾸며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해보자. 지성의 눈으로 냉정히 이해해볼 때 그 죽음의 원인은 자연법칙의 일종인 기상 현상이다. 그러나 상상력을 발동하길 좋아하는 인간은 벼락을 맞아 죽은 까닭은 신이 내린 벌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벼락을 맞아 죽은 사람은 신의 법에 어긋나는 나쁜 짓을 했기에 그 결과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상상한다. 이렇게 자연적 사실을 묘사하는 자연법칙은 상상 속에서 일순간에 명령의 형태를 가진 도덕 법칙으로 변모한다. ‘착하게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벼락을 맞을 것이다’라는 식의 명령 말이다. 기상 현상이라는 자연적 원인의 자리를 군주처럼 처벌을 내리는 신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약한 지성과 과한 상상력을 지닌 아담도 마찬가지다. 단지 과일에 독성이 있으니 신체가 파괴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자연의 인과율에 대한 설명이 주어졌을 때 그는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금지의 명령을 상상해냈다.

사정이 그렇다면, 우리의 지성을 잘 사용해 자연의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것이 바로 신의 법 자체를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데, 신이 자연을 만들었다면 신의 법은 자연법칙 속에 구현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로마서’의 다음 구절을 참조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해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1장 20절) 스피노자는 이 구절을 ‘신학정치론’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해, 모두는 신의 능력과 영원한 신성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할 것과 회피해야 할 것을 알 수도, 또한 추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지적한다.”(황태연 역) 한마디로 신의 법은 신의 창조물인 자연 속에 있고, 우리는 이성을 가지고 이 자연을 보면서 신의 법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법칙을 이해하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과 회피해야 할 것 역시 추론해낼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당연하게도 우리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자연법칙의 생김새를 알면, 그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그 법칙의 파도를 타고 어떻게 순항(順航)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깨달음 역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앞서 우리가 봤던 것과 달리 신의 법은 그것을 따르거나 위반할 수 있는 우리 선택의 자유에 호소하는 법이 아니리라. 오히려 우리 자신을 포함한 만물이 따르는 필연적인 법칙이 신의 법이리라.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인 관계인 이 법 아래에 있을 때 우리는 오히려 자유로워진다. 자기 마음대로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라기보다는 임의성이라 해야 옳다. 자유는 임의적으로 어떤 행위든 할 수 있는 데 있지 않다.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말하듯 자유란 일종의 ‘덕’이다. 신체나 정신의 법칙 등 우리가 타고난 자연법칙에 순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이 갖춰야 하는 ‘덕으로서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신체의 본성을 거스르는 과욕이나 정신의 법칙을 거스르는 비합리적인 생각이 우리를 얼마나 부자유스럽게 만드는지 생각해본다면, 자연법칙에 순응함으로써 얻게 되는 저 덕으로서의 자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신의 법은 무서운 명령도, 우리의 자유를 시험에 들게 하고 우리를 죄짓게 하는 어려운 시험도 아니다. 그것은 요람처럼 우리를 편안히 감싸고 있는 자연의 이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키르케고르와 스피노자

키르케고르(1813∼1855년)는 당대의 교회를 쇄신하고자 한 개혁적인 종교사상가며, 독일관념론과 같은 거대한 체계에서 사유 되지 못했던 단독적인 개인을 철학의 중심에 놨던 철학자다. ‘불안의 개념’(1844)은 이 단독자가 절대자와 마주할 때의 본질적인 심리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이후 실존 철학에 많은 영향을 줬다. 스피노자(1632∼1677년)는 근대의 합리적인 사유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그의 ‘신학정치론’(1670)은 성서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독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서, 종교가 인간을 예속적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을 차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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