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경청·포용..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메르켈

기자 2021. 10. 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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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2015년 베를린의 ‘난민 접수 구역’에서 한 이라크 난민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그해 메르켈은 100만 명 가까운 중동 난민의 독일 입국을 허용했다. 모비딕북스 제공

■ 메르켈 리더십 | 케이티 마튼 지음, 윤철희 옮김 | 모비딕북스

부친에게서 받은 종교적 심성

물리학자로 훈련받은 합리성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비견

獨역사상 16년 재임 최장 총리

민주주의 수호 중심국가 우뚝

“정치는 허황된 이념 아니라

세상을 조금 더좋게 만드는것”

올해 퇴임을 앞둔 앙겔라 메르켈은 ‘독일 정치의 삼관왕’이다. 독일 역사상 가장 오래 재임한 총리고, 최초의 여성 총리며, 동독 출신의 첫 번째 총리이기도 하다. 케이티 마튼의 ‘메르켈 리더십’은 동독 출신 루터교 목사의 딸이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평범한 여성 과학자였던 메르켈이 동독 출신에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딛고 어떻게 정치적 기회를 거머쥐고 독일 역사상 길이 남을 지도자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책의 원제는 ‘The Chancellor’, 재상이라는 뜻이다. 독일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를 염두에 둔 제목이다. 혼돈의 21세기를 철혈의 리더십으로 이끌어온 메르켈이 비스마르크에 비견되는 독일 지도자라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메르켈은 ‘내면에 충실한 정치인’이다. 그녀의 내면을 이루는 토대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종교적 심성과 물리학자로 훈련받은 단단한 합리성이다. 메르켈은 말한다. “나에게 신은 윤리적으로 산다는 뜻이에요. 제 목표는 윤리와 과학을 통합하는 일입니다.”

1954년 메르켈이 태어난 직후,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는 가족을 데리고 동독 템플린으로 이주했다. 공산주의 동독에서 봉사하라는 교회의 부름에 화답하기 위해서였다. 그 덕분에 메르켈은 “호수 하나와 숲 몇 곳”이 있는 한적한 시골에서 교회의 신도였던 장애인들과 함께 자랐다. 슈타지(동독 국가보안부)의 그물망 같은 감시 속에서 자란 그녀는 자유를 갈망했다. 메르켈은 뛰어난 학생이었으나 자신을 마음껏 실현할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마리 퀴리를 롤모델 삼아 과학을 택했다.

종교는 그녀에게 격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부여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조지 W 부시, 블라디미르 푸틴, 도널드 트럼프, 버락 오바마 등 전 세계 우두머리 수컷들이 으르렁대면서 허세를 부릴 때마다, 메르켈은 한마디도 안 하고 침묵을 유지하면서 그들이 제풀에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

메르켈은 정치의 진실이 화려한 수사와 허황한 이념이 아니라, 세상을 조금이나마 좋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과학자답게 그녀는 “문제를 가장 작은, 가장 잘 관리할 수 있는 부분들로 쪼개”고, 하나씩 따져 묻고 검토하면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 결과를 중시하면서 겸손히 들어주고 진솔하게 말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실보다 득이 많은 쪽으로 결론을 이끄는 특유의 합리주의·실용주의는 여기서 나왔다.

메르켈은 무엇보다 자유를 실현하고 세상을 바꾸려면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여성이 권력 없이 이뤄낼 수 있는 건 많지 않습니다. 아이디어가 있어도 실천에 옮길 수 없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그는 기민한 생존 감각을 발휘해 주어진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그녀는 과학을 버리고 정치를 택했다. 성실하고 능력 있는 동독 출신 여성 정치인이 필요했던 헬무트 콜을 후견인 삼아 장관을 지내며 정치적 자산을 쌓았다. 그러나 1999년 콜이 뇌물 스캔들로 위기에 처했을 때, 메르켈은 그를 배신해 낡은 정치를 몰락시키는 혁신 돌풍을 일으켰다. 그 결과, 그녀는 야당 총수 자리를 거쳐 2005년 마침내 총리 자리에 올랐다.

메르켈은 무척 영리했다. 중도 노선을 견지하고 합의 정치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적수들의 아이디어를 훔쳐 상대방 입지를 약화했다. 핵발전소를 폐기하고 기후 위기 정책을 도입함으로써 녹색당의 입지를 축소하고, 기업 이사회에 여성 30% 배정을 의무화하며 평등 결혼에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사민당을 무력화하는 식이었다.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에는 단호했고 학살을 일으켰던 과거사 반성에는 서슴없었다. 메르켈의 성과는 눈부셨다. 2005년부터 16년 동안 독일 총리 자리에 있으면서 그녀는 독일을 ‘정상적 국가’로 만들었다.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수백만 유대인과 난민 등을 학살한 원죄가 있는 ‘야만적인 전범 국가’ 독일은 그녀의 재임 동안 아랍 난민 100만 명을 받아들인 도덕 국가로 거듭났고, 금융위기 극복에 앞장서서 유럽연합(EU)을 방어해 낸 유럽의 맹주로 탈바꿈했으며, 더 나아가 트럼프의 미국을 대신해 자유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중심 국가가 됐다.

메르켈 리더십은 진보를 포기하지 않되 국민이 따라올 수 있는 속도만큼 사회를 앞으로 전진시키는 품격 있는 보수의 길을 보여줬다. 이것이 전 세계가 그녀에게 열광하는 이유고,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까닭일 것이다. 468쪽, 2만6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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