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가 눌러쓴 인사말

박종식 2021. 10. 22. 05:0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아무리 '에세이의 시대'라지만 소설가의 에세이는 조금 더 특별하다.

하물며 '계속해보겠습니다' '건강하시기를' 같은 무심한 구절에도 깊은 숨을 불어넣는 소설가의 에세이라면 더욱 그렇다.

소설가 황정은(사진)의 첫 에세이집이 나왔다.

많은 독자들이 기다려온 첫 에세이집 제목이 '일기'인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썼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기 日記
황정은 지음 l 창비 l 1만4000원

아무리 ‘에세이의 시대’라지만 소설가의 에세이는 조금 더 특별하다. 하물며 ‘계속해보겠습니다’ ‘건강하시기를’ 같은 무심한 구절에도 깊은 숨을 불어넣는 소설가의 에세이라면 더욱 그렇다. 소설가 황정은(사진)의 첫 에세이집이 나왔다.

많은 독자들이 기다려온 첫 에세이집 제목이 ‘일기’인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썼다.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갈 수 있도록 ‘일기 日記’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책을 구성하는 목차 11개를 여는 것도 ‘일기’이고 닫는 것도 ‘일기’이다. 독자는 우선 첫 ‘일기’를 펼쳐서 작가가 지난 코로나의 1년여를 어떻게 지냈는지 들여다본다. 코로나 직전 경기도 파주로 이사해 북적이는 외부 일상에서 멀어진 작가가 산책을 하고 책상 너머 호수공원과 집 앞 공터를 바라보며 고된 쓰기로 아픈 몸을 돌보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고립을 자처하는 팬데믹 일상을 보내면서 작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이 무사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의료노동자나 자영업자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있을 누군가들의 분투에 대해 작가는 생각한다. 그것은 넷플릭스 드라마 <빨간 머리 앤>을 보면서 떠올리는, 학대받는 어린이들이기도 하고 부모의 폭력을 피할 유일한 방법으로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사는 젊은이들이기도 하며 한파에도 노숙 농성을 멈출 수 없었던 세월호 유가족들이기도 하다. 

작가는 2014년 가을 청와대 인근 청운동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유가족 농성장을 방문했을 때 썼던 문장을 곱씹는다. 함께 간 작가들이 제출한 문장을 낭독하는 자리에서 그는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문장을 제출했다. “문장이라기보다는 (…) 자신을 향한 말”이었는데 유가족 앞에서 읽는 상황이 되자 후회와 당혹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지내시냐고, 어떻게 물을 수가 있어.” 그는 이 인사말이 작가로 17년간 써온 문장 중에 가장 후회가 깊어 앞으로도 평생 잊을 수 없는 문장이라고 말한다. 무색무취한 문장 하나가 삶 전체를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듯이 마음을 베는 칼이 될 수도 있음을 다시 한번 그의 글을 통해 확인한다.

‘흔’에서 작가는 어린 시절 겪었던 폭력의 기억을 복기한다. 쓰는 이만큼이나 보는 이도 고통이 느껴지는 글이지만 황정은의 작품이 그렇듯,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독자가 느끼는 건 고통이 아니라 용기이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