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미안해 말아요

한겨레 2021. 10.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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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늘 몸이 아파서 참여하지 못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글 수업 하루 전, 사슴에게 문자가 왔다.

질병이 의외의 사건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가 마주하는 필연적 운명이라면, "아파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은 "태어나서 죄송합니다"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체력이 최고, 건강하라는 말이 의심 없이 덕담이 된 사회에서, 다른 이야기를 건네는 일은 생산성을 위주로 권리의 조건을 따지지 말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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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한겨레Book]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
조한진희 지음 l 동녘(2019)

‘제가 오늘 몸이 아파서 참여하지 못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해요.’ 글 수업 하루 전, 사슴에게 문자가 왔다. 수업을 진행하면 비슷한 연락을 종종 받는다.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평소처럼 답장을 보냈다. ‘아픈 건 미안한 일이 아니니까 마음 편히 푹 쉬길 바라요.’

다음 시간에 사슴은 아픈 몸을 주제로 글을 발표했다. ‘지난 한 주를 꼬박 앓으며 보냈다. 간만에 찾아온 아픔 속에서 익숙하고도 지긋지긋한, 아픔과 나 이외에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고 그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는 지난한 고독과 무기력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리 낯설지 않은 경험임에도 이런 시간이면 어김없이 우울과 함께 자책감이 찾아든다. 생산적인 일이라곤 하나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인간, 누군가에게 걱정과 돌봄이라는 민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는 죄책감이 몸의 고통보다 더 크게 나를 짓누른다.’

발표를 마친 사슴이 말했다. “아파서 죄송하다는 말이 습관처럼 붙었는데, 아픈 게 왜 미안한 거냐는 승은의 말이 저에게는 큰 위안이 됐어요.” 나는 물었다. “왜 아픈 사람이 아픔을 사과해야 하는 걸까요?” 질문을 시작으로, 수업에 참여한 모두가 각자의 질병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빽빽한 학교생활에 치여 강박장애가 생겼다는 A는 학업에 지장이 생길까 봐 불안해했고, 20대 초반 난소에 물혹이 생겼던 B는 신체적 고통보다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되어 여자로서 쓸모없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고 했다. 점점 챙길 약이 늘어간다는 C는 다른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게 두려운데, 그때마다 ‘내가 얼른 죽어야지’라고 말하던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른다고 했다.

각기 다른 경험을 통과한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픔보다 사회적 단절, 낙인, 차별이 더 고통스러웠다는 점이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조한진희 작가는 ‘이상적인 겉모습을 갖춘’ 건강한 성인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한 사회적 구조가 아픈 몸을 억압한다고 말한다. 몸의 상태와 가정환경, 부모의 재산, 성별 등에 따라 우리는 서로 다른 몸의 시간을 사는데, 사회의 시간표는 (도달 불가능한) 건강한 몸의 생산성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그래서 아픔은 이력서의 공란이 되고, 불안으로 연결된다.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만연한 사회에서 아픈 사람은 자신이 몸을 통제하지 못해 병이 생겼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도덕적 실패라는 사회적 낙인까지 부여받는다.

사람은 누구나 취약한 존재로 태어나고, 살아가는 내내 타인과 더불어 의존하며 살아간다. 질병이 의외의 사건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가 마주하는 필연적 운명이라면, “아파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은 “태어나서 죄송합니다”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체력이 최고, 건강하라는 말이 의심 없이 덕담이 된 사회에서, 다른 이야기를 건네는 일은 생산성을 위주로 권리의 조건을 따지지 말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길 바란다”는 작가의 문장을 마음에 꼭 쥔다. 습관처럼 붙어버린 아파서 미안하다는 말을 멈추고 싶어. 존재를 미안해하고 싶지 않아. 말들을 곱씹으며 적극적으로 아픈 몸의 이야기를 읽는다. 이상하고 울퉁불퉁하고 엉망인 몸들의 서사 곁에서 내 연약한 면이 감싸진다.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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