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맛, 해방의 맛

한겨레 2021. 10.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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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지은 뜨끈한 밥 위에 올린 차가운 에쉬레 버터, 그 위에 간장을 몇 방울 똑똑 뿌린다.

밥과 버터와 간장을 쓱쓱 비비면, 그때 코끝에 풍겨 오는 버터 향.

그것만으로 <버터> 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버터는 단독일 때보다 다른 음식에 녹아들 때만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니, 이 책의 향미를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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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한겨레Book]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l 이봄(2021)

갓 지은 뜨끈한 밥 위에 올린 차가운 에쉬레 버터, 그 위에 간장을 몇 방울 똑똑 뿌린다. 날달걀을 얹어도, 달걀 후라이를 얹어도 좋고, 달걀 없이도 괜찮다. 밥과 버터와 간장을 쓱쓱 비비면, 그때 코끝에 풍겨 오는 버터 향. 어떤 이는 행복이 응축된 맛과 향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늘 겉보기 행복의 뒤에는 그를 위해 감수해야 할 일들이 숨어 있다.

유즈키 아사코의 <버터>는 이런 버터의 풍미로 독자를 유혹하는 책이다. 소설은 2009년 일본에서 일어난 기지마 가나에 사건을 원형으로 했다. 1974년생인 기지마는 당시에 만나던 다수의 남자에게 사기를 쳐서 체포되었다가 주위의 남성들이 의문사를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살인 용의자가 된다. 죽은 남자는 여섯, 그중 세 건이 기소 사안이 되었다. 사건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당시에 일본 언론이 주목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외모가 여러 남자를 동시에 유혹하는 여성의 스테레오타입과 자못 달랐다는 점이었다. 당시 한국 선정적인 언론의 감수성도 별반 다를 것 없어서, 당시 기사를 찾아보면 “뚱녀 꽃뱀” 등의 호칭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옮겨 적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살인 사건보다도 이 여자를 보는 사회의 시선, 무엇보다도 여성의 시선에 주목한다. 소설에서 기지마 가나에는 가지이 마나코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주인공은 주간지 기자 마치다 리카다. 동세대 여성으로서 리카는 가지이를 인터뷰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구치소로 찾아간다.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 가지이, 리카는 친구 레이코에게 힌트를 얻어 레시피를 물어보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가지이는 요리를 하지 않는 리카에게 버터간장밥이라도 만들어보고 다시 오라고 답한다. 그렇게 리카는 버터에 접하게 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다.

<버터>에 묘사된 여성은 단면적이지 않다. 가지이는 분명 그를 둘러싼 사회의 편견으로 빚어졌다고는 해도, 적극적으로 자기 욕망을 위해 범죄를 실행했다. 리카는 버터를 먹어 체중이 늘기 시작하면서, 사회가 날씬하지 않은 여성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는다. 여성들은 가부장제 속에서 스스로 억압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불행에 책임을 져야 할 것만 같다. <버터>는 이제까지 유즈키 아사코가 써온 소설의 집합체이다. 요리 소설인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나 <달콤 쌉싸름 사중주>와 유사한 면도 있으나, <서점의 다이아나>와 <나일 퍼치의 여자들>처럼 제도에서 벗어날까 두려운 여성이 스스로 거는 자기최면을 깨려 하는 이야기를 확대했다.

도발적인 시작에 비해서 작은 공동체 연대로 끝나는 결말은 약간 도식적이다. 첫입엔 향긋했던 버터가 나중에 과한 포만감을 남길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널리 알려진 사건에 새로운 추리를 더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래도 달라진 여성이 끝에 남는다. 요리를 하든 하지 않든, 자신의 삶 그리고 다른 여성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여성이 있다. 그것만으로 <버터>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버터는 단독일 때보다 다른 음식에 녹아들 때만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니, 이 책의 향미를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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