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나라는 못맞는 백신, 인플레 재앙 시작된다

이태동 기자 2021. 10. 2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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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불평등, 세계경제 부메랑으로

70.4% 대 2.8%. 18일 현재 고소득 국가(국민소득 1만2696달러 이상)와 저소득 국가(1045달러 이하)의 백신 접종률이다. 고소득 국가는 열 명 중 일곱 명이 최소 한 차례 백신을 맞은 반면, 저소득 국가 국민은 한 번이라도 백신을 맞은 사람이 100명 중 세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 10개월, 고소득 국가에선 일상 회복을 향한 움직임이 단계적으로 이뤄져 왔다. 이미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경제 활동을 재개한 국가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저소득 국가에는 언감생심이다. 백신을 살 돈도, 옮길 인프라도, 접종 인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외부 지원도 지지부진하다. 백신 공동 분배를 위해 출범한 코백스(COVAX)가 개발도상국에 전달한 백신은 9월 말까지 2억4300만회분으로, 올해 목표치(20억회)에 턱없이 못 미친다.

백신 양극화는 인권과 보건 차원을 넘어 글로벌 경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백신 접종률이 낮은 저개발국들이 관광·여행 수입 감소, 공장 가동 중단, 사회 불안 등으로 큰 타격을 받으면서 세계 경제의 성장 엔진 하나가 망가졌다.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공급망 교란과 인플레이션의 배경에도 백신 양극화가 자리 잡고 있다.

◇백신 불평등 비용 6200조원

글로벌 자산운용사 슈로더는 최근 보고서에서 “백신 불평등이 글로벌 공급망에 타격을 입히고,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경고했다. 델타 변이 확산으로 인한 봉쇄 조치와 이동 제한 명령 때문에 공급망에 병목현상이 발생하고, 제품 인도 시간과 대기 주문량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PMI(구매관리자지수)의 운송 시간 지수는 지난해 초 50대 초반에서 지난달 말 사상 최저 수준인 30대 중반까지 떨어졌다. 이 지수가 낮을수록 제품을 운송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이다. 결국 운송비가 늘고 원가가 상승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특히 제조 공장이 밀집한 아시아 개도국의 백신 접종률이 낮은 점이 글로벌 공급망에 치명타로 작용하고 있다. 12일 기준 접종 완료율 16.8%에 불과한 베트남이 대표적이다. 베트남의 경우, 델타 변이가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7월 이후 섬유 의류 공장 35%가 문을 닫았고, 코로나가 특히 심했던 남부 지역은 공급망 90%가 마비됐다. 제품 대부분을 베트남에서 생산하는 미국 의류신발협회가 베트남 섬유·의류 업체 직원들을 위해 자국 정부에 백신 긴급 지원을 요청했을 정도다.

해상 물류가 마비에 가까운 지경에 이른 데에도 백신 양극화가 한몫했다. 화물선 선원 대다수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우크라이나 같은 개도국 출신인데, 백신 접종률이 낮다 보니 선원들이 격리나 출입국 금지 같은 제한에 걸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영국 BBC는 “전 세계 선원 140만명 중 백신을 접종받은 비율이 31%에 불과하다”며 “전 세계 상품의 90%가 바다로 운반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계 무역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고 했다.

이 같은 백신 양극화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은 천문학적이다. 베트남의 경우 델타 변이 확산으로 3분기 국내총생산(GDP)이 6.2% 감소해 통계 작성을 시작한 2000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역(逆)성장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백신 불평등이 심화할 경우 2022년부터 2025년까지 2조3000억달러(약 2700조원)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2022년 중반까지 60% 접종에 실패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의 GDP 손실을 모두 합한 것이다.

개도국 타격으로 인해 결국 선진국이 받을 피해까지 고려하면 손실은 더 불어난다. 크리스티나 게오르기에바 IMF(국제통화기금) 총재는 향후 5년간 전 세계 GDP 손실이 5조3000억달러(약 62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며 “‘거대한 백신 격차(Great vaccine divide)’를 줄이지 않으면 인류의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백신 양극화 해소 전망도 캄캄

이런 우려에도 당장 해결책이 나오긴 쉽지 않다. 백신 제조사에 ‘특허 포기’ 혹은 ‘기술 공유’를 압박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제조사 측에서 난색을 표할 뿐 아니라 국가별로도 입장이 갈린다. 인도와 남아공은 앞장서 백신의 지식재산권 면제를 제안하고, 미국도 이를 지지한다. 하지만 영국, 독일, 스위스, EU는 반대하고 있다. 지재권을 면제하면 제조사의 백신 개발 동기가 사라지고, 면제하더라도 단기 생산량에 큰 차이가 없을 거라는 이유에서다. 특정 조건하에서만 국가가 기술 공유를 강제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오는 11월 열릴 WTO(세계무역기구) 각료 회의에서 이런 제안들이 통과되길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전망은 비관적이다. BBC는 “제안이 통과되려면 164국 모두 동의해야 하는 데 아직 많은 국가가 입장을 정하지도 않았다. 합의에 도달할 시간도 얼마 안 남았다”고 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백신 접근성 격차가 빠르게 해소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비관론이 지배적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백신이 필요한 곳에 공급할 국제적 조정 대신 ‘백신 사재기’와 ‘백신 민족주의’ ‘백신 외교’만 목격했다”며 실망감을 나타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 지난 13일 직접 ‘백신 양극화를 풀 5단계 방안’을 발표했지만, ‘고소득 국가가 기부 약속을 지켜야 한다’ ‘백신 관련 장비에 대한 무역 장벽을 제거해야 한다’ ‘종식을 위한 탈출구는 서로 손잡는 것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등 선언적 수준에 그쳤다. 현재로서는 백신 양극화 해결에 선진국의 ‘선의’ 말고는 답이 없는 상황임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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