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중국의 ‘돼지 도살 순위’

이벌찬 기자 2021. 10. 2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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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윈 알리바바 회장(오른쪽)과 쉬자인 헝다그룹 회장(왼쪽)이 2014년 함께 축구경기를 응원하고 있다. /왕이체육

중국판 포브스로 불리는 ‘후룬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중국 100대 부호 순위’는 중국에서 ‘돼지 도살 랭킹(殺猪榜)’으로 불린다.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이 순위에 오른 부자는 정부의 사정 칼날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가 확인한 결과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 동안 중국 부호 1위에 오른 모든 이가 중국 정부의 직접적인 규제로 곤경에 처했다.

연도 중국 1위 부호(후룬연구소)
2020년 마윈 (알리바바)
2019년 마윈
2018년 마윈
2017년 쉬자인 (헝다)
2016년 왕젠린 (완다)
2015년 왕젠린
2014년 마윈
2013년 왕젠린

2014년과 2018~2020년 중국 부호 1위에 오른 마윈(馬雲) 알리바바 창업자는 ‘빅테크 길들이기’에 나선 정부에 찍혀 두문불출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국 정부는 알리바바의 핀테크 계열사 앤트그룹의 기업공개를 예정일 하루 전에 취소시켰다. 지난 4월에는 알리바바에 수조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2017년 1위에 등극한 부동산 재벌 쉬자인(許家印) 헝다 그룹 회장은 회사가 부도 위기에 놓여 있다. 달궈진 부동산 시장을 통제하려 중국 정부가 지난해 8월 내놓은 대출 제한 정책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또 다른 부동산 재벌 완다 그룹의 왕젠린(王健林) 회장은 2013년과 2015~2016년 중국 부호 1위 자리를 지켰다. 2012~2017년 20여 차례의 해외 투자를 통해 부동산, 호텔, 영화, 스포츠 등 부문에 진출했다가 외화 유출 주범으로 몰렸다. 정부는 2017년 완다를 정조준한 해외 투자 제한 지침을 내놓았고, 지난해까지 완다는 해외 자산 대부분을 매각했다. 현재 왕 회장의 자산은 전성기 때보다 1000억위안(약 18조4000억원)가량 적다.

청나라 거상(巨商) 호설암(胡雪岩·1823~1885년). 한때 상인 가운데 유일하게 모자에 붉은 산호를 달고 다니는 관직에 올랐다./바이두바이커

중국에서 최고 부호들이 곤경에 처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게의 법칙(螃蟹定律)’이 돌아왔다는 말도 나온다. ‘머리가 붉게(紅·성공하고 인기를 얻는다는 의미도 있음) 익으면 죽는다’는 뜻의 이 말은 청나라 거상(巨商) 호설암(胡雪岩·1823~1885)의 실화에서 유래했다. 그는 관직에 올라 모자에 붉은 산호를 달고 다녔다가 정치 싸움에 휘말려 전 재산을 날렸다.

중국의 신흥 부호들은 정부를 피해 숨고 있다. 올해만 해도 전자상거래 업계 3위인 핀둬둬 창업주 황정(黃崢 ·41) 회장, 틱톡 운영사 바이트댄스의 창업자 장이밍(張一鳴·38) 최고경영자가 갑작스레 퇴임을 발표했다. 아시아 최대 여성 갑부인 부동산 기업 ‘컨트리 가든’의 대주주 양후이옌(楊惠姸·40)은 2018년 10월 키프로스 시민권을 얻었다. 중국 부자들은 사회적인 문제에도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마윈이 정부 비판 발언을 해서 탄압의 대상이 됐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목에 이미 칼이 들어온 상황에서 이판사판 직언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왜 중국에서 부자는 이토록 위험할까. 당정국가(黨政國家)이기 때문이다. 당이 시장보다 큰 목소리를 낸다. 중국에서 민영 기업은 도시 일자리 90%, 세수 50%를 창출하는 경제의 기둥인데도 정치 목적에 따라 장기판 위에 말처럼 휘둘린다. 시장과 민주주의 체제라는 적절한 제어 장치가 없는 나라에서 ‘최고 부자’는 최고로 위험한 직업이다. 마윈은 “중국에서 기업에 패배를 안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부) 문건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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