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헌의 뜨거운 밤, 서건창의 잔인한 밤 [스경X스토리]

이용균 기자 입력 2021. 10. 21. 22:31 수정 2021. 10. 2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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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키움 정찬헌 | 키움 히어로즈 제공


14년 전, 정찬헌(32)과 서건창(32)은 광주일고 3학년 친구였다. 그해 여름, 정찬헌은 LG에 2차 1라운드 1순위로 지명됐다. 서건창은 신고선수(현 육성선수)로 LG 유니폼을 입었다.

2차 전체 1순위와 신고 선수 사이의 출발선은 달랐지만 이후 야구 인생은 또 다르게 풀렸다. LG에서 방출된 서건창은 히어로즈에서 다시 기회를 얻었고 2012년 신인왕에 오른데 이어 2014년에는 KBO리그 최초 200안타(201개)와 함께 리그 MVP에 올랐다.

정찬헌은 부상 등으로 기대 만큼의 성장이 이뤄지지 않았다. 갖은 노력 끝에 입단 11년차였던 2018년 팀의 마무리로 27세이브를 거뒀지만 또다시 어깨 부상으로 고난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서건창 역시 2015년 십자인대 부상 이후 수비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9시즌부터는 공격력도 하락세였다.

둘은 트레이드 마감 직전이던 지난 7월 27일 맞트레이드가 됐다. 키움은 선발이, LG는 공격력을 갖춘 2루수가 필요했다.

21일 잠실 LG-키움전은 두 팀에게 모두 절실한 한 판이었다. 앞선 2경기를 모두 내주는 바람에 1위 KT와의 승차가 2.5경기로 멀어진 LG는 선두 희망을 잇기 위해 꼭 이겨야 했다. 키움 역시 끈덕지게 따라붙는 NC와 SSG를 떨어뜨려놔야 했다. 하필 이날 키움 선발은 정찬헌이었다. 트레이드 뒤 잠실 첫 등판이었다. 서건창은 2번·2루수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키움 서건창 | 정지윤 선임기자


정찬헌에게는 뜨거운 밤이었고, 서건창에게는 잔인한 하루가 됐다.

1-3으로 뒤진 3회초 2사 1·2루 때 김웅빈의 2루 베이스 위를 흐르는 타구를 서건창이 따라가 백핸드로 처리했다. 외야로 빠지는 타구를 막아냈지만 2루주자 이정후는 3루를 돌 때 서건창의 포구 위치를 슬쩍 보더니 거침없이 홈까지 달렸다. 서건창의 송구는 ‘바람의 손자’를 따라잡지 못했다. 내야 타구에 주자가 2베이스를 달려 득점에 성공했다. 잠실 구장 분위기가 조금 싸늘해졌다. 중계 화면은 이정후의 쾌주를 연거푸 보여줬고, 그때마다 서건창의 허탈한 표정이 함께 나왔다.

4회 3번째 타석은 3-4로 따라붙은 2사 1·2루에 찾아왔다. 안타 하나면 3회초 수비를 만회할 수 있었다. 친구 정찬헌을 상대로 8구까지 끈질긴 승부가 이어졌다. 서건창은 정찬헌의 포크와 투심, 슬라이더를 모두 걷어냈다. 유광잠바를 입고 잠실을 찾은 LG팬들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동점을 기대하는 순간, 9구째 121㎞ 느린 커브가 한복판을 향했다. 서건창이 아차 싶어 뒤늦게 스윙을 돌렸지만 어정쩡한 헛스윙이 되고 말았다.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었다.

서건창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6회 2사 1루에서는 한현희로부터 어렵게 볼넷을 골랐다. 김현수의 우중간 2루타 때 3루를 돌아 홈까지 달렸다. LG 박용근 3루코치가 팔을 크게 휘젓고 있었다. 여유있으리라 여겼던 홈 대시는, 중계가 조금 빗나갔음에도 태그 아웃으로 마무리됐다. 동점 기회가 사라졌다. 서건창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정찬헌은 불꽃을 태우는 투구로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다. LG 타선의 끈질긴 승부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버텼다. 5이닝을 7안타 3실점으로 막았다. 투구수 105개는 데뷔 후 가장 많은 숫자였다.

LG 김용의(오른쪽)가 21일 잠실 키움전 9회말 극적인 동점에 성공한 뒤 김현수의 축하를 받고 있다. | LG 트윈스 제공


이대로 끝나는 것 같던 승부가 9회말 반전을 맞았다. 경기 내내 불운했던 서건창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4-5로 뒤진 LG의 9회말 공격, 선두타자 홍창기가 내야 안타로 살아 나갔고, 대주자 김용의는 키움 마무리 김태훈의 1구 견제 실책 때 3루까지 달렸다. 서건창은 좌익수 위로 타구를 날리며 귀중한 동점을 완성했다. 무자비했던 야구의 신이 마지막 순간 작은 미소를 보낸 듯 했다.

LG는 키움과 5-5 무승부를 기록하며 정규시즌 우승 희망을 이어갔다. 만약 졌다면 선두 KT와의 승차가 3경기, 2위 삼성과의 승차가 2경기로 벌어질 뻔 했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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