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21세기 지구의 혁신 지도

한겨레 입력 2021. 10. 21. 17:56 수정 2021. 10. 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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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안희경|재미 저널리스트

최근에 식물재배기라는 가전제품이 출시됐다. 와인 냉장고처럼 투명한 문을 단 전자제품이다. 그 안에 씨앗키트를 넣어 전기를 꽂으면 갓 자란 유기농 채소를 따 먹고 꽃망울 터진 꽃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중형 냉장고 값이다. 식물을 길러본 적 없는 이를 위해 식물 재배 과정 대부분을 자동화했다고 홍보한다. 나만의 스마트 정원을 갖자고, 혁신이라고 자랑한다.

혁신일까? 아무리 부르짖어도 이는 자연을 모방한 제품일 뿐이다. 지천에 널린 진품을 공짜로 쓸 수 있는데, 짝퉁을 목돈 주고 사는 가전생활이라. 슬기로운가? 벌레와 미생물의 협업 없이 탄생하는 유기농 채소는 없다. 식물재배기는 내 입으로 들어가는 채소가 유기농임을 눈으로 확인하며 소비하려는 욕구에 돈과 전기를 쓰는 것이다. 내 손으로 일구는 텃밭 농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독일의 연구는 흙에 손 넣고 일하는 시간 속에서 장내 미생물 분포가 달라진다고 밝혔다. 운동장 포장을 걷어 흙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유치원 아이들의 면역력이 높아졌다. 자연과 접촉하는 몸의 부위를 늘리면서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이로움을 얻는다. 그러나 소비사회는 또 하나의 가전 혁신으로 인간의 몸을 한층 더 자연과 분리시킨다.

혁신을 요구하는 시절이다. 가장 다급한 지구적 혁신 과제는 탄소배출 감축일 것이다. 지난 18일 한국 정부도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최종안을 의결했다.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계획이다.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곳곳에서 나왔다. 간단하지는 않지만 결코 이루지 못할 일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20세기에만 해도 인류는 역사에 없던 일을 선언에서 현실로 이뤄낸 바 있다.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그의 책 <미션 이코노미>에서 국가가 강력한 계획을 세워 온 국민의 지지 속에서 이를 추진했을 때, 목표 달성은 물론이고 장기적인 경제 번영까지 함께 이뤄냈음을 분석했다. 1960년대 케네디 정부가 추진한 달나라 작전이다.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뒤진 미국은 ‘달에 사람을 보내 안전하게 데려오기’라는 대전제를 발표했다. 국가 기관과 기업들을 한데 묶어 목표를 달성하라는 단 하나의 지시를 내린 다음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작전은 성공했고, 무수한 혁신이 쏟아졌다. 휴대용 컴퓨터가 나왔고, 소프트웨어라는 개념이 등장했으며 실리콘밸리도 탄생시켰다. 통신에서 주방용품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편리가 쏟아졌다. 나이키 에어 운동화, 무선 헤드폰, 메모리폼, 냉동건조식품, 분유 등이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의 주도 속에 나온 제품이다. 지구 환경에 대한 압력이 없던 당시, 혁신의 방향은 편리와 무한정 소비로 이어졌고 경제 규모를 키웠다.

만약 지금 ‘2030년까지 탄소배출 반감’이라는 대전제를 이데올로기 경쟁만큼 몰아붙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제학자 마추카토는 물론이고, 도넛 경제학으로 지구 위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케이트 레이워스도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들은 지금 우리에게 모든 자원이 있고, 기술과 창의력까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탄소배출 감축이라는 목표만이 분명할 뿐 그 목표가 가야 할 방향은 안갯속이다. 20세기 달나라 작전이 만들어낸 혁신의 세계는 소비사회였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지구는 위기를 맞았다. 우리는 좀 더 진화된 대전제를 제시해야 한다. 원자재를 소비하고 쓰레기로 버리는 추출 자본주의가 아닌 재생하고 회복하는 순환 경제를 가리켜야 한다. 공유와 분산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방향이어야 신안 앞바다를 태양광 패널로 뒤덮자는 20세기 발상이 혁신으로 둔갑하지 않는다.

21세기 지구의 혁신은 무엇을 어디까지 소비하고 소유할 것인가 논의하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곳에서 국가는 혁신의 깃발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나와 너의 소비를 돌아봐야 하겠다.

몇달 전, 집 마당에서 모임을 했을 때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에 물기가 가시지 않아 빨래건조대를 한쪽에 몰아둔 채 손님을 맞았다. 미안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는데,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빨래 널린 거 정말 오랜만에 봐요.”

입술과 음료수 잔 사이에 빨대가 들어왔듯이 우리 몸과 물·햇볕·바람 사이에 전자제품들이 끼어들어 왔다. 소비를 권장하는 세상이 점점 더 몸의 많은 기능을 무디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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