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칼럼] 집단의 폭주

한겨레 2021. 10. 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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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칼럼]집단의 구성원 다수가 어느 한쪽으로 생각과 감정이 기울어질 때, 이와 반대되는 개인의 소신을 지켜내는 일은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 다수가 선택하는 길을 간다. 그러나 다수가 찬성한다고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니다. 소수의 권리와 인권이 보호받고 존중되는 사회에서 비로소 성숙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강우일|베드로 주교

1944년 8월5일 오스트레일리아 ‘카우라’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일본군 병사 1104명이 사상 최대의 집단탈출을 감행하였다. 그 와중에 234명의 일본군 병사가 죽고, 감시하던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도 4명 희생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당국은 일본군 포로들의 집단탈출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카우라 포로수용소는 제네바 협정을 충실히 지켜 포로들에게 관대한 처우를 보장하고 있었다. 부상자나 영양실조 병사들에게는 충분한 치료와 간호가 이루어졌고, 수용자 전원에게 부족함 없는 식사와 일본인들이 즐기는 생선도 지급되었다. 포로들은 평소 토마토와 포도 등을 재배하며 농사일로 소일하였고, 연극 야구 씨름 마작 등의 오락도 허용되었다. 그들이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어떠한 폭력 사태나 위해 행위도 없었다. 탈출에 성공해도 포로수용소가 위치한 카우라는 시드니에서 250킬로미터나 서쪽 내륙으로 들어간 오지였고, 주변에 몸을 숨길 만한 피신처도 없어 금방 붙잡힐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포로들은 새벽 2시에 진군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가 철조망에 모포를 걸쳐놓고 기어올라 탈출을 시도했다. 경비병이 위협 사격을 가했으나 이들은 몸을 숨기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오히려 경비병을 향해 정면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빨리 쏘라고 외쳤다. 이들이 지닌 무기는 기껏해야 식사용 나이프와 포크, 그리고 야구방망이 정도였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의 기관총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탈출이 실행되던 밤은 보름달이 떠 있었고 조명 없이도 사물의 윤곽이 다 드러나 보이는데, 이들은 스스로 막사에 불을 질러 주변을 대낮같이 환하게 밝히고 자신들의 모습을 송두리째 노출시켰다. 일본군 병사들은 의도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경비군의 총탄에 표적이 되도록 자신들의 몸을 노출시키고 스스로 전사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철조망을 넘어서 탈주한 이들도 체포되기 전에 자결한 병사가 많았고, 나머지도 8일 만에 모두 잡혔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다른 수용소로 이감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3월 일본으로 모두 귀환하였다.

도대체 이들이 탈출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스트레일리아인들에게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일본 군인들의 집단탈출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괴이한 집단의 폭거였다. 일본 국내에서도 이 사건은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지난 8월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카우라는 잊지 않았다>(미쓰다 야스히로 감독)가 개봉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당시 카우라에는 정원을 초과하는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고, 오스트레일리아 군 당국은 이들 중 일부를 타 수용소로 이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통보를 받고 카우라의 일본군 포로 간부들이 모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어떤 포로는 ‘구사일생으로 얻은 소중한 목숨이 아닌가, 어떻게든 살아서 귀국하여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적극 동조하는 병사는 없었고, 모두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결국 이들은 이감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투표한 결과, 80%가 이감 거부를 선택했다. 이감 거부는 봉기와 탈출을 의미했다. 생존자들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하였다. 카우라의 일본군 병사들은 모두 부족함 없는 편안한 수용소 생활 속에서도, 가슴 밑바닥에는 항상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받지 말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군인 의식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는 도조 히데키 육군대신이 내린 훈령이었다. 수용소에서 포로로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군들에게는 죄책감이 되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들은 살아서 멀쩡한 몸으로 조국에 돌아갈 수는 없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총 맞아 죽을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고, 몸 숨길 건물도 아무것도 없는 수용소 밖으로 탈주를 계획하였다.

생존자들 모두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으나, 포로들 사이에는 ‘죽기 위한’ 계획에 찬성할 수밖에 없는, 거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압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제국이 전쟁에 광분하던 시절, 누구도 표현은 못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빨간 딱지’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소집영장이 당도하면 동네 사람들 앞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멸사봉공하겠다고 외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온 가족이 ‘비국민’이 되어버리는 ‘분위기’가 온 나라를 지배했다. 카우라의 어떤 생존 포로는 자신이 목숨을 바치지 못하고 몸 성히 일본으로 송환될 경우, 자신이 주변으로부터 받게 될 손가락질과 가족들이 겪게 될 따돌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고 토로하였다. 이 다큐 영화의 대본을 쓴 작가 나카조노 미호는 대학생 시절 자신의 종조부의 인도로 카우라를 함께 여행하고 처음으로 폭동 이야기를 들었다. 이 종조부는 전쟁이 끝난 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가족 누구에게도 자신이 카우라에서 포로로 살았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종손이 다큐의 대본을 쓴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중얼댔다고 한다. “정말 하느님이 계신다면,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우리에게 그런 바보 같은 짓거리는 집어치우라고 호통을 치시지 않았을까…?” 다수 집단의 착각과 오류는 개인의 양심의 소리를 이렇게 수십년 동안 질식하게 하였다.

개인 또는 소수가 집단의 분위기를 거슬러 자기 소신을 관철하기는 쉽지 않다. 집단의 구성원 다수가 어느 한쪽으로 생각과 감정이 기울어질 때, 이와 반대되는 개인의 소신을 지켜내는 일은 보통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 다수가 선택하는 길을 간다. 그러나 다수가 찬성한다고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니다. 소수의 권리와 인권이 보호받고 존중되는 사회에서 비로소 성숙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철이 다가오면 언론기관들이 다양한 보도와 여론조사 결과를 쏟아낸다. 많은 대중이 여론의 추이에 관심을 갖고, 여론의 향방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여론은 반드시 객관적, 윤리적인 가치 기준에 연동하여 작동하지 않는다. 또한 오늘의 시대에는 개인적 홍보 수단들이 아무런 이성적 판단과 윤리적 식별의 여과 장치 없이 강한 목소리와 주장들을 세상에 쏟아낸다. 이 시대는 난무하는 목소리와 주장들 중에서 무엇을 택할지 우리에게 자유를 허용하지만, 판단은 각자의 책임이다.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바람과 분위기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진리와 정의의 시선으로 식별하고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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