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언젠간 넘을, 아직은 힘든

김혜윤 입력 2021. 10. 21. 17:56 수정 2021. 10. 2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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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김혜윤|사진뉴스팀 기자

어찌어찌 엄마와 아빠의 시간, 돈, 감정을 소비하며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엄마는 대학에 갈 생각에 부풀어 있는 나를 앉혀두고 “이제 겨우 8부 능선을 넘었다”고 말하며 앞으로 나에게 9부, 10부 능선이 또 나타날 거라 말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딱히 9부 능선이라 할 사건은 없었다. 신입생 때 축제 준비를 하는데 학교에서 3일 뒤에 우리 학과를 통폐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약학대학 편입학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에도 큰 시련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9부 능선은 사진기자 생활을 하면서 내 앞에 나타났다. 지난여름, 코로나19 스케치를 위해 예방접종센터를 찾았다. “오늘은 여자 사진기자님이 많이 오시네요.” 나름 친근함의 표시였을까. 내가 오기 전에 다른 회사 소속 여자 선배 한 분이 이미 와서 스케치를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거였을까. 뭐였든 간에 ‘여자 사진기자’라는 말이 뇌리에 박히는 순간 그대로 멋쩍게 웃으며 취재를 하러 들어갔다. 취재를 하는 내내 ‘남자 사진기자들이 연이어 오는 날에도 그들에게 ‘오늘은 남자 사진기자님이 많이 오네요’라고 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선별검사소를 찾았을 때 “한겨레는 여자 사진기자가 많네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같이 있던 다른 회사 선배도 “부서에 남자만 있는데 여자를 뽑는 건 선배들이 엄청난 용기를 낸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마음으로는 ‘15명 중에 4명밖에 안 되는데 많은 걸까요?’, ‘그게 왜 엄청난 용기인 거죠? 사람을 뽑았을 뿐인데’라고 외쳤지만 그 자리에선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멋쩍게 웃어넘겼다.

‘한겨레에는 여자 사진기자가 많다’는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다. 시작은 채용공고가 뜬 다음이었다. 한겨레에 원서를 쓰려고 한다는 말을 인턴기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선배들에게 하면 많이들 ‘한겨레에 이미 여자가 많아 뽑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한명, 두명, 여러명에게 들을 때마다 엄마가 말했던 9부 능선이 아직 어둠 속에서, 안개 속에서 ‘이게 네가 진격해야 하는 9부 능선’이라고 자기소개하는 기분이 들었다. 위축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무면접 단계부터 위축됐다. 혹시라도 내가 여자라서 뽑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스펙도 점수도 그 어떤 응시자보다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9부 능선은 사진부에 들어오면서 또렷하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9년 겨울, ‘한겨레에 이미 여자 많은데 또 여자 뽑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막 사진기자가 되어 나가는 현장마다 들었다. 말을 잃었다. 내가 잘못 뽑힌 건가 하는 생각도 가끔 들었다. 그래서일까. 사진기자 체육대회에서 다른 회사 선배가 당시 부장에게 “한겨레 또 여자 뽑았냐”고 말하자 부장은 “계속 여자만 뽑아서 부서를 여자로 채울 생각이다”라고 말한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되게 감사했고 아직도 감사하다.

이 글을 써 내려가다 키보드에서 여러번 손을 뗐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동안 세상이 조금은 변해서 까먹고 있었다. 다른 언론사에서 인턴을 할 때, 선배들한테 ‘거기 이번에 사람 뽑는대요’라고 하면 ‘거기는 여자 안 뽑아’라는 말을 들었다. 세상이 조금은 변해서 ‘거기’들에 여성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이 더 변하길 희망한다. 아직도 많은 선배가 ‘우리 사람 뽑는다’고 말했다가 합격자가 남자면 ‘사람 뽑았다’고 하지만 여자면 ‘여자 뽑았다’고 하기에.

말을 잃게 만드는 이야기를 듣는 빈도가 줄었지만 여전히 약간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지난여름처럼 멋쩍게 웃는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슬기롭게 대처하며 사진기자 생활을 할 수 있을지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현타’가 오지만. 그래도 이제는 ‘요즘 그런 말 하시면 큰일나요’라고 하기도 한다. 조금 더 용기가 생기고 덜 위축되면 마음속으로만 외쳤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볼 생각이다.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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