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 말고 '사회적 공감'

한겨레 2021. 10. 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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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엘리자베스 에이(A) 시걸 교수가 쓴 <사회적 공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심리학자 수전 피스크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다. “어떤 사람이 힘이 없다는 것은 상세히 정확하게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알기 원하지도 않기 때문에 고정관념의 대상이 된다.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부하들로 하여금 권력자의 인상을 자세히 살피게 하고, 살필 수 있고, 살피길 원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아주 낮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타인에 대한,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에 대한 공감 능력이 낮다. 마음이 냉담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관심을 선택적으로 써도 되기 때문이다. 읽자마자 많은 이들이 떠오른다. 군대를 동원해 자국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두고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를 잘했다고 말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부터 그렇다.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거라던 일전의 망발과 앞뒤가 잘 맞는다. 힘없는 이들의 삶에,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집단의 경험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비판이 일자, 즉각 호남에도 전두환이 정치 잘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며 합리화했다. 타인은 이런 때 동원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어떤가. 지난 19일, 국정감사에서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의 사단법인 설립 불허가 차별이라고 지적하자 “동성애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상하다. 서울시는 분명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제출한 신청 서류에 미비함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여느 단체에 하듯 절차에 따라 허가하면 된다. 동성애자 시민의 존재는 애당초 합의 사항이 아니며, 시민의 단체 설립은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이다. 오세훈 시장은 혐오에 동조해 명백한 차별을 하고도 짐짓 중립인 척한다.

성공회대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 학생회에서는 만장일치로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를 결정했다. 어린이든 아니든, 장애인이든 아니든, 성적 소수자이든 아니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1인용 화장실을 추가로 설치하는 복지 정책이다. 성공회대는 장애인화장실이 아예 없는 건물도 있다. 하지만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 요구에 학교는 ‘시기상조’와 ‘사회적 합의’를 들먹이며 예산 배정을 미루고 있다. 강조하건대, 사회적 합의와 다수결을 혼동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문재인 대통령이 41%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며 59%가 반대했으니 사회적 합의에 따르지 않았다고 말하면 수긍해야 할까. 아니다. 왜냐면 사회적 합의는 보통선거를 실시해 득표율 1위를 당선자로 한다는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는 여론과도 다르다. 여론은 측정 방식에 따라 달라지고 그래서 선동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 사회적 합의는 변화하는 대중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키는 원칙에 관한 것이다. 사람은 하루에 최소 8번 이상은 화장실을 가게 된다. 그래서 누구나 집 밖을 나왔을 때 갈 수 있는 공중화장실이 곳곳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합의다. 지금 성공회대에 필요한 건 더 이상의 합의가 아니라 총장을 비롯한 결정권자들이 매일매일 화장실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고통을 살피는 것이다. 바로 사회적 공감이다.

시걸 교수는 사회적 공감을 “다른 사회적 집단 및 사람들의 삶과 상황을 인식하고 경험함으로써 이들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정의하며,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사회적 공감 능력이 커질수록 더 행복한 사회가 됨을 지적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은 그들의 떨어지는 사회적 공감 능력을 감추기 위해 ‘사회적 합의’란 단어를 쓴다. 최대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아무 책임도 지고 싶지 않을 때 늘 사회적 합의를 내세운다. 사회적 합의 타령은 집어치우자. 속지도 말자. 필요한 건 사회적 공감 능력이다. 이것이 다음 선거에 누굴 뽑을 것인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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