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저렴 시 투자 가능'..LH직원 메모에 투기 정황 담겼다 [사건추적]

김준희 2021. 10. 2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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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5일 진보당 전북도당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북본부 앞에서 집회를 열고 부동산 투기 이익 환수를 촉구하고 있다. 전북도당은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이름을 '한국투기주택공사'로 바꾸는 퍼포먼스를 했다. 연합뉴스


법원 "업무상 비밀 이용해 재물 취득해"


부동산 투기 혐의로 기소된 LH 전북본부 직원 A씨(49)는 재판 내내 "사업 추진 내용은 언론 보도 등으로 공개돼 내부 정보를 이용한 투기가 아니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업무상 비밀을 이용해 재물을 취득했다"고 판단해 A씨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그가 사들인 토지를 몰수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A씨가 '비공개 정보'를 다루면서 그가 작성한 메모와 사업 도면에는 '투자 가능', '세금 부담 여부' 등 수상한 단어를 기록한 것이 유무죄를 가른 결정적 단서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주지법 형사4단독(부장 김경선)은 지난 18일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고, 아내 등 명의로 구입한 땅을 몰수했다. 정부 합동특별수사본부가 지난 3월 부동산 투기 의혹 수사를 시작한 이후 유죄 판결을 받은 LH 직원은 A씨가 처음이다.

A씨는 2015년 3월 LH가 추진하는 공공주택지구 조성 사업 예정지인 완주군 삼봉지구 인근 토지 1318㎡(약 400평)를 아내 명의로 지인 2명과 함께 2억9800만원에 매수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들이 사들인 토지는 5년 새 공시지가 기준 40% 이상 올랐다.

내부 정보를 활용한 부동산 투기 혐의를 받는 LH 전북본부 직원 A씨(49)가 지난 4월 8일 전주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치고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20년 근무…공공주택단지 사업 담당"


도대체 A씨는 LH에서 어떤 일을 했고, 그가 산 땅과 무슨 연관이 있기에 법원은 유죄로 봤을까. 21일 중앙일보가 입수한 판결문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 봤다.

판결문에 따르면 A씨는 20년 가까이 LH 직원으로 근무하며 공공주택단지 등의 사업을 담당했다. 2015년 2월부터 2016년 1월까지는 완주 삼봉 공공주택지구 조성 사업에 필요한 개발·실시계획안 수립·설계·발주·준공 등 인허가 관련 업무를 맡았다.

삼봉 공공주택지구는 LH가 91만4978㎡ 면적에 아파트 5826세대, 단독주택 233호의 공공주택 단지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2014년 7월 해당 사업이 국민임대주택단지 예정 지구에서 공공주택지구로 전환되자 LH 전북본부는 사업부지 내 이용 계획을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A씨는 사업지구 지구계획 변경 승인 신청서와 도면을 기안한 실무를 담당했다. 사업 기간과 건설 호수, 수용 인구, 인구 밀도, 녹지율 등 토지이용계획과 주거용지, 공공공지, 지방도 교차로 변경, 공공주택 밀도, 층고 상향, 배치 계획 등 사업지구 내 이용 계획이 모두 담겼다. LH 전북본부는 2015년 4월 A씨가 작성한 승인 신청서를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제출해 그해 10월 승인받았다.

수도권 신도시 부동산 투기 의혹을 수사 중인 전북경찰청 반부패범죄수사대가 지난 3월 22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북본부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뒤 압수물을 차량에 싣고 있다. 연합뉴스


"공개될 경우 지가 변동, 민원 발생 우려"


A씨는 "지구계획 변경안 수립 업무를 수행하면서 알게 된 정보는 '비밀'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 사업은 2007년 건설교통부 고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됐고, 2008년에는 사업 부지 내 토지 등 소유자들에 대한 보상 절차가 마무리돼 사업 부지에 펜스가 설치되는 등 일반인들도 쉽게 사업 부지 및 사업 규모를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A씨는 "2014년 10월 당시 LH 사장이 국정감사에서 '이 사업에 관해 2015년 하반기에는 착공하겠다'고 답변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돼 비밀성을 상실했다"고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법률에서 정하는 비밀'이자 '외부 공개가 금지된 정보'로 봤다.

재판부는 "LH는 토지 개발 등 지가의 상승과 하락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보들을 다루기 때문에 내부 정보를 '비밀', '대외비', '비공개'로 나눠 관리하고 있고, 이 사건 사업지구에 관한 이용 계획 도면 등은 '비공개'로 나눠 관리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규모 공공주택단지 사업에 관한 이용 계획은 확정되기 전까지는 변경될 가능성이 상존하는데 이용 계획 및 그에 관한 도면이 일반인에게 공개될 경우 해당 지역 및 인근 지역의 지가 변동을 유발하거나 해당 지역에 설치되는 시설 등에 관한 민원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진보당 전북도당이 지난 3월 17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북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투기 부동산 몰수와 지방의원 및 고위공직자 전수 조사를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은퇴 후 음식점·카페 운영"…"지인들은 몰라"


A씨는 "완주가 고향이고 은퇴 후 배우자와 함께 음식점이나 카페를 운영할 목적으로 관련 부서에서 일하기 전인 2015년 초 친구에게 부탁해 토지를 매수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정보가 비밀이더라도 시세 차익을 얻을 목적으로 토지를 취득한 게 아니다"고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A씨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A씨가 해당 사업의 지엽적인 정보까지 알고 있었고 변동되는 정보도 출력해 보관했던 점 ▶토지를 함께 산 지인 2명에게 카페나 음식점을 차릴 예정이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은 점 ▶동창이 정작 본인은 가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해당 토지를 '단 한 건' 소개해 줬는데 A씨 측이 즉시 수락해 매수한 것은 이례적인 점 등이다.

재판부는 특히 A씨가 해당 사업지구에 관한 이용 계획 도면을 출력해 그가 사들인 토지 위치를 표시한 다음 '식당(?) 불가능성 있음'이라고 적은 사실에 주목했다. A씨는 해당 토지와 사업지구 사이 도로에 중앙분리대가 있는지, '가격 저렴 시 투자 가능'이라는 단어도 적었다.

LH 직원들의 '땅 투기 의혹 사태'가 확산하던 지난 3월 15일 전북 전주시 효자동 LH 전북본부 인근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 뉴스1


투자 후보지 순위 매기고 '절세 여부' 메모


그는 또 토지 투자 후보지 순위를 '① a지구 ② b지구 ③ c지구 ④ d마을'이라고 매기고, 토지 양도 시 세금 부담 여부, 보유 기간에 따른 절세 여부 등을 검토하는 메모를 작성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식당·카페 등을 하기 위해 해당 토지를 매수했다면서도 '뱀이 나온다'는 항의를 받고 청소를 한 2020년까지 약 5년간 해당 토지를 전혀 이용하지 않고 방치했다"며 "당시 자산 8억2000만원 중 금융 자산(1억5000만원)보다 부채(3억5000만원)가 많아 신중한 성격의 피고인으로서는 지인들과 나눠 매수하는 방법으로 위험 부담을 줄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A씨는 "해당 토지를 매수한 행위가 범죄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며 이른바 '법률 착오'를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고인이 스스로 작성한 메모 등에 해당 토지를 취득한 데 대해 '대응 논리' 등을 작성한 것에 비춰 보면 피고인도 토지 매매 이후 자신의 행위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A씨는 지난 20일 항소장을 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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