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선 광해군, 죽어선 아파트 눈치 보는..원종의 비애

노형석 2021. 10. 21. 05: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아파트 철거 논란' 김포 장릉
19일 오후 김포 장릉의 원종릉과 인헌왕후릉 봉분 사이에서 남향을 바라본 모습. 멀리 검단신도시 고층 아파트 건물이 빽빽하게 올라온 광경이 보인다. 노형석 기자

얄궂은 운명이다.

400여년 전 임금 광해군 눈치만 보며 여생을 보내야 했던 배다른 동생이 있었다. 죽은 뒤 임금 칭호가 내려지고 무덤도 왕릉으로 격상된 그는 21세기에 지하에서 자기 무덤 앞에 짓쳐들어온 고층 아파트 눈치를 보는 처지에 놓였다. 경기도 김포 장릉의 주인공 정원군 원종(1580~1619)의 사연이다. 그는 인조의 아버지다. 1623년 반정으로 광해군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고, 남한산성 전투에서 청에 항복해 ‘삼전도 치욕’을 당한 그 임금이다.

원종의 말년 삶은 불우했다. 총명했던 막내아들 능창군은 역모에 몰려 귀양을 살다 자결했다. 아들이 터 잡고 살던 서울 서촌 기슭 땅은 광해군에게 빼앗겨 경희궁 터가 됐다. 원종은 회한에 휩싸여 술만 마시다 마흔도 안 돼 화병으로 숨졌다. 비참한 처지를 한탄한 글귀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해가 뜨면 긴 밤 무사히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동생과 부친의 원통한 최후를 지켜본 둘째 아들 능양군(인조)은 마음속 칼을 갈았다. 다른 보수파 공신들과 능동적으로 반정에 동참해 왕이 된다.

19일 오후 장릉의 석인상 옆에서 남쪽을 조망한 모습. 빽빽이 들어선 고층 아파트 풍경과 무인석상의 엄숙한 표정이 기묘한 대비를 보여준다. 노형석 기자

원종은 후궁의 소실이었기에 왕세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반정으로 왕이 된 아들 인조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는 데 몰두했다. 서자이고 왕세자 출신도 아닌데 어떻게 사후에 임금으로 추증하느냐는 신료들과 정면 대결하면서 10년 가까이 정쟁을 벌였다. 후대 역사학계는 원종 추숭논쟁이라고 부른다. 인조는 의지를 관철시킨다. 원종이라는 임금의 묘호를 내렸고, 무덤도 왕릉인 장릉으로 승격시켰고, 종묘 사당에 어머니 인헌왕후와 함께 군주로 배향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명에서 청으로 바뀌는 국제 정세의 급변과 위급한 국방 상황에서도 인조는 다른 국정 과제를 제쳐놓고 울분으로 죽은 부친의 임금 만들기에 결사적으로 매달렸던 것이다.

지금 세계유산 코앞에 20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논란의 진원지가 된 김포 장릉은 이런 파란만장한 내력을 품고 있다. 들머리에서 능역 가는 길엔 상수리나무·참나무·단풍나무가 우거진 산책로가 펼쳐진다. 싱그러운 연꽃 연못 연지가 있고, 안쪽에는 아늑한 잔디언덕 위로 소담한 봉분 두개가 우람한 문무인석과 함께 관람객을 맞는다.

장릉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문무인석 석물과 봉분이 놓인 축선이다. 높이 3m 넘는 문무인석은 기골이 장대하고 우람한 17세기 조선 석조 미술의 대표작으로, 부친의 임금 추숭을 위해 전력을 다했던 인조의 의지가 물화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장릉의 두 봉분이 놓인 방향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북쪽으론 파주에 있는 아들 인조의 장릉, 남쪽으론 인천의 주산 계양산과 직선의 방향축으로 이어지게 돼 있기 때문이다. 왕릉 건립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선후대 혈족 일가의 능원과 무덤 정면에서 바라보는 안산(계양산)을 잇는 시선의 축이다. 바로 이 축선을 지금 건설 중인 대형 고층 아파트군이 끊어놓았다. 단지 세계유산 보존환경 유지의 차원을 넘어 조선 왕릉 조영원리의 근본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역대 초유의 반달리즘 사태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2014년 김포 장릉 봉분 장명등 옆에서 남쪽을 조망한 사진. 왕릉을 건립할 당시 안산으로 설정됐던 계양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화재청 제공

사실 김포 장릉은 인근 주민들과 일부 역사 애호가들 말고는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무덤 주인은 사실상 잊혀졌다. 하지만 그가 남긴 공간과 사건들은 오늘날을 있게 한 역사와 공간의 기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더욱 의미가 무겁다.

흥미진진한 후일담이 하나 더 전해진다. 원종의 어진(초상)은 다른 역대 임금 어진들과 함께 모두 48본의 어진 모음으로 일제강점기까지 창덕궁 궁궐 신선원전에 전해졌는데, 한국전쟁 당시 피난 수도 부산의 임시보관소에 옮겨졌다가 1954년 모두 불에 타는 비극을 겪었다. 그래도 이 초상화는 전해지던 두 본의 작품이 각각 반쪽씩만 타고 남았다. 1872년 궁중화원들이 과거 전래본을 바탕으로 그린 그의 어진은 왼쪽 몸체가 남았고, 1935년 채색화 대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그의 어진은 얼굴과 오른쪽 몸체가 남았던 것이다. 이를 국립고궁박물관이 서울대 미술품보존연구센터와 손잡고 2015~2017년 기적적으로 합체시켜 전체 얼굴상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불탄 조선왕조의 어진 가운데 유일하게 전면 복원에 성공한 사례로 기록을 남기게 됐다. 초상의 위풍당당하고 호남 같은 풍모와 달리 <조선왕조실록> 등 사서에는 ‘정원군의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해 손가락질 받았다’는 악평의 기록도 전한다. 권력에 눌린 왕족의 일그러진 삶이 풍채 좋은 초상 속에 숨어 있는 셈이다.

1935년 화가 이당 김은호가 원종의 옛 어진을 바탕으로 모사해 그린 초상화. 1872년본과 함께 1954년 불타 오른쪽 몸체 부분이 없어졌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1872년 제작된 원종 어진. 1954년 화재로 불타 얼굴을 포함한 왼쪽 부분이 사라졌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불탄 채 남은 두쪽의 원종 어진 작품을 2015년 디지털 합성해 온전한 그림으로 만든 복원도.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어진 복원으로 풀리는 듯했던 원종의 비운은 이번에 불거진 왕릉 앞 고층 아파트 건설과 철거 논란으로 도돌이표처럼 복기되는 중이다. 아파트 철거를 위한 청원 참여자가 20만명을 넘기면서 문화재 경관을 파괴하는 재개발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여론을 움직이고 있다. 그간 대형 건물을 막 지어놓고 대마불사를 거론하며 문화재 경관 훼손을 묵인했던 재개발 전례에 철퇴를 내릴지, 봉합하고 또 다른 전례를 용인할지의 문제가 걸렸다.

철거 문제를 떠나 한국 문화재 보존사와 예술 행정에서 지니는 함의가 크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리를 하는 행정의 측면에서 등재우선주의로 달려왔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현장 환경 관리 중심으로 가는 전환점의 의미도 있다. 문화재청과 지자체에서 학예사 인력 보강과 유산 감시체제 강화를 촉진하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도 커졌다. 반면 입주자의 피해를 역설하면서 세계유산 목록에서 장릉을 빼달라는 청원도 등장해 여론 흐름은 쉽게 단정하기 어려워졌다.

조만간 열릴 문화재위원회는 철거와 존치 사이에서 어떤 해법을 내놓을까. 고르디우스의 매듭 자르기일까, 솔로몬의 판결처럼 지혜로운 대안이 나올까. 그것이 세간의 관심사겠지만, 죽어서도 눈치 봐야 하는 원종의 운명에 더욱 애잔한 상념이 생기는 것도 피할 수 없다.

김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