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언론인의 노벨 평화상 수상과 줄리언 어산지
[경향신문]
올해 노벨 평화상은 언론인에게 돌아갔다. 필리핀의 두테르테와 러시아의 푸틴이라는 독재자에 맞서 언론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두 나라 언론인이 공동 수상했다. 언론인이 이 상을 받은 건 86년 만이라고 한다. 내심 스웨덴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받길 기대한 터라 적잖이 실망했다. 그럼에도 언론 종사자로서 반가웠다.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노벨위원회가 고마웠다. 다만 하고많은 언론인 중에 하필 이들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독재자는 언제나 존재했고, 이에 항거한 언론인도 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영어의 몸이 된 채 잊혀가고 있는 한 언론인 때문이다.
줄리언 어산지. 2010년 기밀폭로 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를 통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 일지, 국무부 외교문서 등을 폭로해 전 세계를 뒤흔든 인물이다. 그의 폭로로 이라크에서의 잔학행위와 관타나모 베이에서의 고문, 대규모 감시 프로그램 운영 등 테러와의 전쟁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 언론에서 그의 이름은 찾기 힘들다. 그의 폭로를 대서특필하던 유수의 언론들이 외면해서다. 지난달 26일 야후뉴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미 중앙정보국(CIA)이 어산지 납치·암살 계획을 세운 사실을 폭로했다. 위키리크스가 2017년 CIA 기밀문건을 폭로한 데 대한 보복 차원이라고 한다.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지만 미 정부의 암살 계획은 그 자체가 불법이다. 용납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명백한 특종인데도 언론들은 침묵했다. 미 언론감시단체 페어(FAIR)에 따르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BBC는 소말리아판에만 전했다.
어산지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못지않은 언론 자유의 수호자다. 그가 없었다면 국가 권력의 폭력과 음모는 감춰졌을 터이다. 하지만 언론은 그에게 다른 잣대를 적용했다. 무엇보다 헌법이 보장한 언론 자유를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는 미 언론의 이중 태도는 아이러니하다. 뉴욕타임스의 펜타곤 페이퍼스 폭로나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도 언론 자유 덕분 아니었던가. 미 정부는 어산지의 행위를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헌법상 언론 자유는 외국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어산지는 호주인이다. 미 정부는 이런 이유로 어산지를 간첩법 위반 등 18개 혐의로 기소했다. CIA는 위키리크스를 ‘비국가 적대 정보기관’으로 지정했다. 어산지가 미국으로 송환되면 최장 175년간 복역할 수 있다고 한다. 언론인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환호하면서 어산지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미 정부 논리에 충실한 언론의 책임이다.
어산지는 현재 런던 동부의 벨마시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과거 스웨덴에서 저지른 성폭행 사건과 관련한 보석 규정 위반으로 2019년 4월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체포됐으니 벌써 2년 반째다. 보석 규정 위반에 대한 50주 수감도 오래전 끝났다. 그가 신청한 보석도 거부됐다. 미국이 요청한 그에 대한 송환 절차가 영국 법원에서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영국 고등법원은 오는 27~28일 어산지에 대한 항소심 심리를 연다. 미 정부가 올해 초 1심 법원의 송환 불허 결정에 항의해 항소한 데 따른 것이다.
항소심 심리를 닷새 앞둔 22일 런던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린다. 미국의 전쟁범죄와 고문, 납치, 인권남용을 규탄하기 위한 민간법정이다. 어산지의 미 송환 저지와 그의 석방 촉구가 목적이다. 그가 수감된 교도소 이름을 따 ‘벨마시 법정’으로 명명했다. 이 법정은 55년 전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미국의 베트남 전쟁범죄를 심판하기 위해 만든 러셀 법정을 원용했다. 러셀 법정은 1967년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두 차례 열렸다. 비록 린든 존슨 당시 미 대통령 등 전쟁 책임자를 재단하지는 못했지만 국가 책임에 대한 11가지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도 공범이라는 판결도 그중 하나다. 판결 결과는 구속력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침묵을 깨고 모두가 외면한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인류의 양심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어산지의 미 송환은 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에 대한 박해이기도 하지만 언론 자유의 미래가 달려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미국과 영국 정부의 어산지 송환 음모를 막지 못하면 언론 자유는 국가 안보에 밀려 설 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언론인이 이 문제에 침묵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조찬제 논설위원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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