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라스트 듀얼', 중세 미투의 진실..세 가지 시점의 의미

김지혜 2021. 10. 2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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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거장 리들리 스콧은 모든 장르를 섭렵한 달인이지만 역사극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글래디에이터'(2000)로 정점을 찍었으며 '킹덤 오브 헤븐'(2005), '로빈후드'(2010), '엑소더스:신들과 왕들' 등의 대서사극을 통해 발군의 연출력을 보여왔다.

84살의 나이에도 지치지 않은 창작욕을 발휘하고 있는 그가 오랜만에 시대극으로 돌아왔다. 중세의 결투 재판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가 20일 개봉했다.

거장의 내공을 확인할 수 있는 역작이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지만 극의 몰입도는 뒤로 갈수록 상승하며 후반부 결투 장면에서는 최대치에 이른다.

14세기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유서 깊은 가문 카루주가의 부인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는 남편 '장'(맷 데이먼)이 전쟁 참전으로 집을 비운 사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남편의 친구 '자크'(아담 드라이버)에게 강간당한다. 자크는 "입을 닫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며 침묵을 강요하지만 마르그리트는 용기를 내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자크는 영주 달랑송(벤 애플렉) 백작의 총애를 받아 성주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장은 공평한 재판을 받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해 이 사건을 국왕에게 가져간다. 사건이 세간의 관심사로 떠오르자 왕은 결투 재판을 명령한다. 장과 자크가 결투를 벌여 살아남는 자가 승리하는 재판 방식이다.

◆ 하나의 사건, 세 개의 시점…부활한 '라쇼몽' 구조

'라스트 듀얼'은 하나의 이야기가 세 개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같은 시간, 같은 인물, 같은 이야기를 그리지만 누가 화자가 되느냐에 따라 시각차를 보인다. 이 같은 내러티브 형식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일본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이다. '라쇼몽'은 하나의 사건에 당사자 3인과 관찰자 1인의 시점을 제시해 인간의 이기심과 진실의 상대성을 꼬집은 걸작이다.

각본을 쓴 맷 데이먼, 벤 애플렉, 니콜 홀로프세너가 왜 '라쇼몽'의 형식을 가져왔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언뜻 보기에 이 구조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세 인물의 시선으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동일한 선상에서 세 번이나 재출발시켜야 한다. 152분의 러닝타임은 이야기의 반복 구조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다. 게다가 각본은 성폭행을 둘러싼 진실을 다루면서 야만의 시대를 지배했던 여러 사회 모순들까지 꼬집었다.

장과 자크의 시선으로 진행된 2장까지만 보더라도 다소 무의미한 시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마르그리트의 시선으로 사건이 재구성되는 3장부터 실망감은 만회된다.

관점 제시를 장→자크→마르그리트 순으로 한 것도 의도가 명확하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라는 성폭력 사건의 출발선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앞선 두 장이 가해자이자 방관자인 남성들의 시선으로 사건을 그렸다면 마지막 장은 피해자인 여성의 시선을 제시해 진실에 보다 가깝게 다가간다. '라쇼몽'이 진실의 상대성을 강조하며 사건에 대한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면, '라스트 듀얼'은 "이것이 진실"이라며 확실하게 제시한다.

스콧 감독은 관객이 세 인물의 관점을 따라가게 만들면서 끝내 결투장으로 입장시킨다. 결투 재판은 진실이 승리하는 게 아니라 이긴 자가 승리하는 방식을 취한다. 결투에서 남편인 장이 지게 될 경우 마르그리트까지 무고죄로 화형을 당하게 된다. '진실 대 거짓'의 대결뿐만 아니라 '살거나 혹은 죽거나'를 결정하는 참혹한 현장에서 보는 이들은 결투의 관중인 동시에 재판의 배심원이 되는 기분까지 느끼게 된다.

◆ 야만의 시대, 여성의 목소리는 없었다

리들리 스콧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시대의 공기 또한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시대는 광증을 앓았던 왕으로 유명한 샤를 6세 통치기다. 밖으로는 영국과의 백년전쟁이 한창이었고, 안으로는 귀족 간의 파벌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른바 '혼돈과 광기의 시대'였다.

영화는 중세 귀족 사회의 병폐와 모순, 신의 뜻에 대한 자의적 해석, 허울 뿐인 기사도 정신 등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장과 자크는 오랜 우정을 다져온 친구 관계인 동시에 경쟁자다. 전쟁에 함께 참전해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지만 출세를 두고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관계기도 하다. 결국, 권력 싸움과 질투 등이 보이지 않은 영향을 끼치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일종의 거래 성격이 짙었던 결혼 제도에 대해서도 꼬집는다. 마르그리트의 아버지는 몰락한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기 위해 딸을 카루주가에 시집보낸다. 막대한 지참금은 결혼의 보상 성격이다. 그러다보니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취급된다. 장이 자크가 아내를 범한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것은 남편으로서의 분노도 있지만 자신의 소유물을 빼앗겼다는 분노도 크다. 

이런 야만의 시대에 여성의 목소리가 인정받을 자리는 없었다. 마르그리트는 얼굴과 신분을 드러내면서까지 사건을 공론화했지만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고통받는다. 남편의 친구에게 처절하게 능욕을 당했음에도 정숙하지 못했다는 오해를 받으며 손가락질 당한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요구와 비판은 이 시대에는 당연하게 자행되는 폭력이었다.

3명의 각본가가 영화의 기반이 된 논픽션 소설과 달리 세 개의 관점을 제시한 것은 당시에는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던 재판을 영화를 통해 대리 제시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판에 선 가해자와 피해자는 자신이 진실이라 믿는 것을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건은 철저히 개인의 시선에서 재조합 되기도 한다. 영화는 인간의 이러한 속성을 세 개의 각기 다른 관점 속에 투영한다. 그러면서 시대의 억압에 의해 묵살되었을 피해자의 목소리에 가장 크게 귀를 기울였다.

마르그리트를 연기한 조디 코머는 카멜레온 같은 연기로 시대의 분위기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영화의 메시지를 돋보이게 만든다. 세 개의 챕터에서 마르그리트는 각기 다른 여성으로 보일 정도다. 1장에서 순종적인 아내였다면, 2장에서는 유혹의 경계 아래 놓인 여성, 3장에서는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강단 있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장과 자크의 위선적인 면모가 강조되는 3장에서 조디 코머는 무표정으로도 많은 감정을 표현한다.

장과 달랑송을 연기한 맷 데이먼, 벤 애플렉은 특유의 반듯한 이미지를 깨고 '못난 남자'로 변신했다. 매력적인 악역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캐릭터지만 두 배우는 작품을 위해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치졸한 얼굴을 꺼내 놓고 최선의 연기를 펼쳤다. 두 배우는 각본에도 참여했다. 자크 역의 아담 드라이버도 특유의 개성과 매력적인 연기로 파렴치한의 면모를 소름 끼치게 그려냈다.

◆ 스콧 감독이 '중세 미투'를 통해 던진 메시지

스콧 감독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영화의 분위기를 뒤바꾸는 과격한 결투 장면을 배치했다. 오프닝에 예고된 장과 자크의 결투는 극 후반부, 피와 살이 튀는 대결로 20여 분간 생생하게 펼쳐진다. 거장의 내공과 화력을 느낄 수 있는 연출이다. 화려한 카메라 워킹보다는 효과적인 클로즈업과 사실적인 사운드 조합을 통해 1:1 결투 장면의 치열함을 극대화했다.

퇴로 없는 결투와 승패가 명확한 승부를 통해 스콧 감독은 사실로서의 역사를 보여준다. 패자에 대한 확실한 응징은 일순간 통쾌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에필로그 영상과 실제 사건의 결말을 알리는 문구가 올라가고 나면 씁쓸함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면 2017년 10월 할리우드를 강타한 미투 운동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리들리 스콧은 영국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면에서 업계의 죄책감을 다룬 영화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우리는 설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제와 수행 방식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것 또한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 의식과 메시지가 시대 정신과 화두에 부합한다면 관객이 내릴 다양한 해석도 환영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결투를 마지막으로 프랑스에서 결투 재판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라스트 듀얼'은 야만의 시대에 벌어졌던 한 사건을 소환함으로써 지금에라도 진실이 오롯이 진실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기를 염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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