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노동자가 뭔 휴가?" 5년 장기농성 천막 나온 재복씨의 일상

오승훈 입력 2021. 10. 20. 18:26 수정 2021. 10. 20.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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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 해고노동자 모습은 정형화돼 있잖아요. 머리띠 묶고 팔뚝질만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나오면서 되레 사람들로부터 멀어지죠. <휴가> 를 통해 해고노동자의 사적인, 우리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담고자 했어요. 오랜 싸움에 지친 그들에게도 사실 휴가는 필요하니까요."

영화 <휴가> 로 장편 연출 데뷔한 이란희 감독은, 지난 18일 진행한 인터뷰에서 해고노동자가 열흘 동안 휴가 가는 흥미로운 설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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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개봉영화 '휴가' 이란희 감독 인터뷰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 3관왕 수상 이력도
영화 <휴가>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뉴스 속 해고노동자 모습은 정형화돼 있잖아요. 머리띠 묶고 팔뚝질만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나오면서 되레 사람들로부터 멀어지죠. <휴가>를 통해 해고노동자의 사적인, 우리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담고자 했어요. 오랜 싸움에 지친 그들에게도 사실 휴가는 필요하니까요.”

영화 <휴가>로 장편 연출 데뷔한 이란희 감독은, 지난 18일 진행한 인터뷰에서 해고노동자가 열흘 동안 휴가 가는 흥미로운 설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1일 개봉하는 <휴가>는 해고노동자의 휴가 아닌 휴가를 담은 영화다. 지난해 말 46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장편 대상 등 3관왕에 올랐다.

영화 <휴가>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가구 공장에서 해고돼 5년째 천막농성 중인 재복(이봉하)과 동료들은, 해고 무효 소송이 최종 패소하자 잠시 휴가를 갖는다. 오랜만에 간 집은 농성장보다 더 어수선하다. 두 딸은 냉랭하고 집안 꼴은 말이 아니다. 쓸고 닦고 밥하던 재복은 큰딸의 대학 입학 예치금을 마련하고 막내에게 롱패딩을 사주기 위해 나무 공방에 일을 나간다. 그곳에서 사고를 당하고도 산업재해 신청을 못 하는 청년 준영(김아석)을 알게 된 재복은, 그의 집을 찾아가 밥을 해주고 보일러를 고쳐준다. 산재 신청을 권하는 재복에게 준영은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거 안 한다’고 잘라 말한다. 집에 돌아오자 딸들은 “소송도 지지 않았냐.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다그친다. 농성장 동료에게서 오는 전화를 안 받던 재복은 밤새 뒤척인다.

영화 <휴가>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해고노동자가 뭔 휴가냐?”는 극중 친구의 말처럼 재복에게 휴가는 주어지지 않는다. 농성장에서 동료들의 식사를 책임지던 그는 집과 일터에서조차 누군가의 밥을 차리고 일상을 보살핀다. 기존 남성 해고노동자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남성적인 중년 노동자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어요. 밥과 청소 등 돌봄노동뿐만이 아니라, 대화하는 방식도 공격적이기보다 삐치거나 토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죠.” 산재 신청을 거듭 권하는데도 준영이 거절하자 삐쳐서 집을 나서는 장면이 그것. 오디션을 통해 연극배우 출신인 이봉하를 캐스팅하게 됐다는 그는 “무뚝뚝한 인상이면서도 유쾌하고 귀여운 면이 있었다. 너무 부유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기도 했다”며 웃었다.

영화 <휴가>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지난 2012년 기타 제조사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만든 밴드 공연을 보고 장기농성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이 감독은, 단편 <천막>(2016)을 통해 장기농성 노동자들의 천막 속 일상을 그려낸 바 있다.

배우 출신으로 영화 <웰컴 투 동막골>(2005) 등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영화에 캐스팅이 하도 안 돼서 ‘그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연출을 시작했다”고 했다.

“밥줄 끊긴 사람들이 같이 밥줄 찾기 위해 애쓴다는 뜻에서 부제를 ‘밥줄’로 하려 했다”는 그는, 참고한 작품으로 독일 영화 <인 디 아일>(2018)과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를 꼽았다. 개인적으론 사회·노동 문제를 꾸준히 다뤄온 영국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오랜 팬이라고 했다.

영화 <휴가>를 연출한 이란희 감독. 인디스토리 제공

자신의 고난만으로 충분히 힘겨울 법하지만, 재복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다. “스스로를 존중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해고노동자가 다른 이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통해 가난해도 존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다만 위무할 뿐이다. 우리를 위로해줄 새로운 사회파 감독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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