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형의 여담]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

한겨레 입력 2021. 10. 20. 18:16 수정 2021. 10. 21.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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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형의 여담]

영국의 ‘테니스 샛별’ 에마 래두카누가 지난 9월12일 유에스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는 루마니아 출신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뉴욕/AP 연합뉴스

김민형|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여러 해 전에 나라별로 노벨상 수상자를 분류한 위키피디아 목록에 한국인이 두명 수록돼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한명은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이었고, 또 한 사람은 화학상을 받은 찰스 존 피더슨이었다. 피더슨은 1904년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노르웨이인,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이 항목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이 당연히 많았을 것이어서 지금은 피더슨의 한국 연고가 삭제됐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로 분류하는 것은 억지라는 말이 타당하다. 그런데 넓은 세상에 그런 ‘억지’는 흔하다.

이런 종류의 논란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경우는 스포츠 선수들의 국적일 것 같다. 가령 올림픽 출전 선수들의 국적 변경은 자주 관심의 대상이 된다. 2018년에 <국적연구> 저널에 올림픽팀의 일원으로 국적을 바꾼 운동선수 167명의 사례를 분석해서 ‘국적의 시장경제’를 연구하는 논문도 실렸다. 정확히 국적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근에 유에스오픈 테니스에서 우승한 에마 래두카누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중국인이 많아서 영국에서 의아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국 내의 이민 커뮤니티는 그녀를 둘러싼 영국민의 애국적인 환호를 위선으로 보기도 했다. 평소에 차별의 대상이던 이민자를 갑자기 ‘자랑스러운 영국인’ 대접한다는 것이었다. ‘성공은 아버지가 많고 실패는 고아’라는 속담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 같으면 미국, 독일, 스위스가 다 자국 노벨상 수상자로 선전한다. 위키피디아에 실린 그의 국적은 다음과 같다. ‘뷔르템베르크 왕국(1879~1896), 무국적(1896~1901), 스위스(1901~195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911~1912), 프로이센 왕국(1914~1918), 프로이센 공화국(1918~1933), 미국(1940~1955)’. 다소 얄팍한 연고를 홍보에 사용하는 기관이 국가인 것만은 당연히 아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머튼 칼리지에는 시인 티에스(T.S.) 엘리엇의 발자취가 사방에 전시돼 있다. 대형 강의실 건물을 2010년에 완공했을 때 ‘티에스 엘리엇 극장’이라고 이름 지었고, 전부터 있던 티에스 엘리엇 회의실과 혼동 때문에 방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칼리지의 홍보물에 엘리엇의 이름이 한없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다. 정작 엘리엇이 머튼에서 지낸 기간은 방문 학생으로 온 1914년 가을부터 1년이었고, 옥스퍼드를 너무 싫어해서 런던으로 자주 도피했다는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참고로 머튼 칼리지는 1264년에 창건돼 옥스퍼드의 가장 오래된 칼리지 세개 중 하나이고, 자산 규모도 옥스퍼드 39개 칼리지 중 상위 5~6위를 항상 맴돈다.

유명인의 국적을 중요시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해할 만하다. 기본적으로 수상자와 같은 나라 사람이면 그 정도 성취할 수 있는 여건을 자기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긍지, 마음의 위안 때문일 것 같다.

노벨 재단 홈페이지에 적혀 있는 찰스 존 피더슨의 이력은 흥미롭다. 그의 아버지는 선박 엔지니어로 화물선을 타고 동양으로 왔다가 영국이 관할하는 조선 세관에서 일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가 미국의 동양광업개발회사가 운영하는 평안북도 운산 금광에 엔지니어로 취직했고, 거기서 피더슨의 어머니 야스이 다키노와 만나서 결혼했다. 어머니는 그 당시 조선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가족과 운산 근방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운산 금광에서는 영어가 통용됐기 때문에 피더슨은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8살 때 영어로 교육받을 수 있는 일본 나가사키의 가톨릭계 학교로 보내졌다. 이어 미국 오하이오주의 데이턴 대학교로 진학했고 매사추세츠 공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듀폰사에 취직해서 일생을 연구원으로 일했다. 특이한 촉매 크라운 에테르를 발견한 업적을 인정받아 198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짧은 이력으로 판단하자면 특정 국적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종류의 사람이라는 인상이고, 또 다분히 실용적인 시각의 소유자 같기도 하다. 그의 부모 역시 무역과 기회를 좇아서 세계를 돌아다닌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인생의 성공을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지금도 인간 사회의 특권과 계급의 작용 때문에 별다른 기회 없이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런가 하면 전세계의 지적·문화적·교육적 자원이 점점 많은 사람에게 접근 가능해지는 시대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여건 속에서 노벨상 수상자의 국적에 어느 정도 집착하는 것이 적절한지 생각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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