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빚 공화국'이 몰고 온 오징어게임 광풍

정민정 논설위원 2021. 10. 2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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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산 팔아도 빚 못 갚는 가구 증가
코로나 직격탄 자영업자 '대출의 늪'
빚 내야 살 수 있는 대한민국 자화상
극단 내몰린 서민들 아우성 직시해야
정민정 논설위원
[서울경제]

2019년 11월 성북구 성북동에서 70대 어머니 정 씨와 딸 세 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우편함에는 카드사·신용정보사에서 보낸 각종 고지서와 채무이행통지서 등이 쌓여 있었다. ‘성북동 네 모녀 사건’이다. 같은 해 9월에는 대전에서 40대 부부와 초등학생·유치원생 자녀가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현장에선 “사채로 채무가 많고 사기를 당해 경제적 문제로 힘들다”는 유서가 발견됐다. ‘방배동 모자 사건(2020년)’ ‘송파 세 모녀 사건(2014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극들이 등장인물만 달리한 채 무한 반복되고 있다.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빚더미에 극단까지 내몰린 생활고가 ‘OO 사건’으로 명명되는 비극들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 전 재산을 팔아도 빚을 갚지 못하는 고위험 가구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2012년 20만 8,000가구였던 고위험 가구는 지난해 40만 3,000가구로 2배나 폭증했다. 더 위험한 신호는 전체 고위험 가구 대비 무직 가구 비중이 2018년 13.1%에서 지난해 16.4%로 늘었다는 사실이다. 경기 침체에 코로나19까지 겹쳐 일자리마저 잃고, 앉은 자리에서 빚만 늘어나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힌 것이다.

그나마 자산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조차 대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지난 1분기 주택담보대출이 있는 사람 가운데 43.9%가 신용대출을 안고 있었다. 신규 주택담보대출자 가운데 신용대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사람도 41.6%에 달한다. 치솟는 집값·전셋값에 ‘영끌’ ‘빚투’에 나선 20~30대 청년층의 부채 부담은 정상 범위를 넘어섰다. 2분기 말 현재 2030세대의 가계 부채 잔액은 488조 원, 전체 가계 부채의 27%를 차지한다. 지난해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한 20대 청년 수가 해당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소식은 앞으로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암울한 예감을 심어준다.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자영업자들의 처지는 더욱 딱하다. 2분기 말 금융권 대출을 받은 자영업자는 250만 5,000명에 이르고 잔액은 858조 4,000억 원에 달한다. 이 중 다중 채무자는 140만 6,000명으로 자영업 대출자의 절반을 넘는다. 다중 채무자는 대출 규모가 큰 데다 빚으로 또 다른 빚을 돌려 막다가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빚으로 빚을 연명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전 세계적인 열풍을 몰고 온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한국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일지도 모른다. 해고 노동자, 펀드매니저, 탈북자, 외국인 노동자 등 게임판에 끌려 온 이들은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모두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안고 바닥까지 추락한 ‘루저’들이다. 르몽드는 “오징어 게임의 이면에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한국 사회의 병폐가 숨어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한국의 가계 부채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치솟으면서 2014~2018년 마포대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800여 명 중 다수가 빚에 쪼들리는 상황이었다고 부연한 것은 가슴 아픈 대목이다.

영화 ‘기생충’이 지하, 반지하, 1층, 2층 등 수직적 기준으로 나뉜 공간을 통해 계급 간 간극을 상징했다면 ‘오징어 게임’은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자 ‘빚 공화국’ 대한민국에 대한 고발장인 셈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출범 당시 가계 부채 총량 관리를 국정 과제로 제시하면서 “빚 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빚을 내야만 (집 한 채라도) 살 수 있는 사회’로 치닫더니 급기야 ‘(대출 규제로) 빚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사회’가 됐다. ‘오징어 게임’이라도 있으면 목숨을 담보로 참가해 지긋지긋한 ‘빚 공화국’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루저들의 아우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현실은 드라마 같고, 드라마는 현실 같은 요지경 세상이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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