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 챙겨주고 늘 내 곁에서 격려해준 '돌머리'.."보고 싶구나"

기자 2021. 10. 2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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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싶습니다 - 재수 시절 만난 친구 오평식

매년 수능을 앞둔 이맘때쯤이면 유독 기억나는 친구가 있다. 오평식. 이 친구를 만난 건 1980년 민주화운동으로 한창 사회가 어수선할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난 진주의 시립도서관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고, 각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서울로 간 고교 친구들은 진주로 내려왔다. 반가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잠시, 난 나의 미래를 그리며 홀로 서울로 향했다. 여태껏 객지생활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고, 집안 형편도 넉넉지 않은 터라 여러 가지 걱정이 앞섰지만, 일단 부딪쳐 보자는 생각으로 상경했다. 단기간이라 숙소를 구하기도 어려워 불광동의 한 독서실에 짐을 풀었다. 환경이 바뀌었으나 이를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노량진 단과학원을 전전하며 학습에 충실했다.

독서실 생활은 그런대로 적응하니 생활할 만했지만, 아침저녁으로 찬 이슬이 내리는 옥상에서 찬물로 머리를 감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머리를 감으려면 먼저 머리를 마찰해야 하는 준비가 필요했다. 열이 나게 막 문지른 다음에 순간적으로 머리를 찬물에 담가 빨리 비누칠을 해야 하는데 거품이 잘 안 나 시간이 길어지니 머리가 얼얼하고 띵한 게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식사도 늘 사 먹어야 했기에 돌아서면 배가 고팠고 영양도 부실했던 것 같아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그때쯤 독서실에서 알게 된 친구가 오평식이다. 자기를 소개할 때 “돌머리 오평식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고 그러려니 했다. 이후 평식이하고는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며 많이 친해지게 됐고 왜 그 친구가 돌머리라고 했는지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하루는 저녁 식사를 하고 둘이서 독서실로 돌아오는데 불량 학생으로 보이는 덩치 큰 몇 명이 우리를 불렀다. 시비를 걸면서 돈을 달라고 하는 거였다. 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 친구는 그냥 씩 웃고 넘겼다. 그래도 집요하게 괴롭히니 평식이는 옆에 있던 각목을 주워 와서는 그 자리에서 머리로 내리쳐 두 동강을 내버렸다. 이를 본 학생들은 놀라 도망쳐 버렸고, 미처 도망 못 가고 머뭇거리던 애들에게 독서실 친구들 다 불러 모으라고 얘기하는 게 아닌가. 독서실의 구석진 방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고3들이 양쪽으로 쭉 앉아 있는 가운데 평식이는 일장 연설을 했다. 학생일 때 공부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재수해야 하고 머리가 굳으면 공부하기 어렵다는 말과 함께 다시 자신의 돌머리 위력을 보여줬다. 두꺼운 사기 컵을 들고 그대로 머리로 받아 박살을 내버렸고 순간 애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이후 기분 전환 겸 밖으로 나와 불광동 거리를 걷는데 평식이는 버려진 각목 하나를 주워 머리로 내리쳐 두 동강 내면서 효천이 1번 갈비뼈라고 하며 크게 웃었다. 이후 평식이는 보이는 각목마다 두 동강 냈고 그날 나의 갈비뼈는 모두 나갔다. 나는 친구에게 “공부에 취미가 없어 돌머리라고 하나 했는데 진짜 돌머리구나” 하며 많이 웃었다.

당시 나는 서울 사람은 깍쟁이고 이기적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평식이를 통해 선입견이었다는 걸 알았다. 키도 크고 잘생긴 친구가 의리까지 겸비했으니 이보다 멋진 친구가 있을까 싶다. 평식이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도시락까지 싸와 챙겨줬고, 내가 향수병으로 힘들어할 때도 늘 나를 격려하고 지켜줬다. 나는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시험이 가까워지며 나는 다시 진주로 내려와야 했고, 시험 잘 보고 진주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날을 기다렸지만, 평식이는 사정이 생겨 내려올 수 없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고 서로 떨어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자주 연락이 되지 않았는데 그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 사진도 한 장 남기지 못해 너무 아쉽다.

찬 이슬이 내리고, 입시철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그 시절, 그 친구 얼굴이 많이 떠오른다. 지인을 통해 연락을 해보려 했지만 안 됐는데 문화일보로 인해 다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그때 다하지 못한 말,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어떻게 변했을까. 많이 보고 싶구나. 친구야.

석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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