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살림은 짐승들과 나누는 것이라지만..
글·사진 이남석 자전거 여행가 2021. 10. 20. 09:46
화촌일기 <17> 산골의 입추
홍천강변서 80평생 산 노인 "6·25 때도 고향 지켰지"
홍천강변서 80평생 산 노인 "6·25 때도 고향 지켰지"
태풍은 주로 초가을에 지나간다는 얘기는 자주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곡식이 여물기 시작하는 계절에 장마가 시작된다는 걸 이번에 처음 경험했다. 올해는 비가 남쪽으로만 쏟아 붓고 중부지방은 늦여름 가뭄이 심해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비는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계곡은 넘치고 모래나 바위틈에서 간신히 생명을 보전하던 가재들이 불어난 웅덩이 안에서 더듬이로 수위를 쟀다. 그런데도 이튿날 공작산 노천 저수지 수위를 보니 별 변화가 없었다. 아직도 강수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김장용 배추를 심기 위해 한 달 전, 뒷밭에 나가 한 자 깊이로 흙을 파서 갈아엎고 거름을 편 후 충분히 비를 맞혔다. 비가 지나간 뒤 푸석해진 밭에 비료를 뿌리고 비닐을 덮은 후 배추를 심었다.
가뭄 뒤에 쏟아진 비로 늦게 일어난 풀이 기를 쓰며 씨를 맺고, 건너편 고목에서는 오색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마치 록밴드의 능숙한 드럼 연주자 소리 같았다. 다 심고 나서도 평지와는 다르게 산골에서는 마지막 일이 남았으니, 바로 고라니나 멧돼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밭 주변에 망을 두르는 일이다.
그 고충을 털어놨더니 누가 듣기 좋은 말로 얘기하기를 “산골 생활은 짐승들과 나누면서 사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걸 실천하기에 나는 아직 수행의 깊이가 얕았다.
사실 땅 파고 거름 내며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짜 힘든 일은 그것들이 잘 자라도록 돌보는 일이다. 특히 잡초와의 줄다리기는 귀촌한 사람의 인내심을 측정하는 첫 번째 시험이다.
여름에는 비가 그친 뒤 풀을 베어내도 일주일만 지나면 한 뼘씩 자란다. 예초기에 휘발유와 엔진오일을 넣는 일이 바쁠 정도이다. 밭 주위로 조선호박을 심어 처음에는 심심찮게 따먹었다. 호박은 비교적 왕성한 덩굴식물이니 잡초 정도야 이길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내버려 뒀는데 점점 잡초와 환삼덩굴에 제압당하더니 결국 늙은 호박 몇 개만 남기고 운명하셨다.
버섯 잘못 먹고 죽은 일가족도 많아
토요일에는 모처럼 집사람과 숲 구경에 나섰다. 버섯꾼들에 의하면 무릎에 찬바람이 닿아야 하고, 집 주변 야산에 독버섯이 보여야 깊은 산에도 버섯이 난다는 말이 있다. 아직은 이르지만 그동안 내린 비에 숲이 푹 젖었을 테니 올라온 버섯 사진도 찍고 혹 오미자도 뵈면 따자는 말로 아내를 설득했다. 산에 오를 때는 뱀과 진드기를 조심해야 하므로 긴바지와 긴소매 윗옷은 물론이고 목이 긴 장화에 차양 넓은 모자로 무장을 했다.
공작산 옆 응봉산으로 들어서자 매미와 풀벌레 소리에 바야흐로 계곡은 초가을 분위기였다. 작년에는 계곡 건너편 너덜지대를 전부 뒤덮을 정도로 오미자가 풍성했는데, 올해는 신통치 않았다. 늘어진 피나무와 층층나무는 이제 막 씨가 단단해지기 시작하고, 신갈나무와 참나무는 확실히 작년보다 열매 수가 줄었다.
큰 나무들이 쓰러져 주변의 습기가 모인 곳으로 버섯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송이나 능이, 갓버섯이나 싸리버섯, 목이버섯 등을 제외하고는 모르는 버섯이 대부분이라 사진을 찍고 냄새를 맡아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옛날에는 버섯 잘못 먹고 죽은 사람들도 있었지. 시아버지가 아침에 밭에 나갔다가 따와서 주니 먹는 버섯인 줄 알고 온 가족이 볶아 먹고는 변을 당한 거야. 그래도 젊어서는 가을 한 철 버섯을 따다가 장에 내다가 팔면 학교 댕기는 애들에게 책 사라고 용돈은 줬지 뭐.”
홍천에 나갔다가 함께 버스를 타게 된 노파에게 버섯이 나기 시작하는 때를 물어보자 젊어서 없는 살림에 중학교에 다니는 애들을 위해 망태 들고 산으로 버섯을 따러 다니던 얘기를 털어놨다.
잣나무가 울창한 곳은 틀림없이 화전민들이 일궈 먹던 밭이 있던 자리인데 올해는 잣이 대풍인지라 벌써 잣나무숲 근처로 높은 장대와 낫을 들고 잣을 따러 다니는 사람들도 보였다.
입추가 지나며 나뭇잎이 무거워지고 바람도 조금씩 식기 시작하면 산속 동물들이 분주해진다. 특히 멧돼지나 오소리가 먹이를 찾아서 숲을 헤집고 다닌 흔적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청설모는 잣나무를 옮겨 다니며 잣을 떨어뜨리고, 다람쥐들은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모으느라 바쁘다.
싸리버섯을 발견하고 절벽 밑으로 내려가다가 바위 밑에 작은 굴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오소리가 새끼를 키우고 나간 흔적이 뚜렷했다. 굴 안에는 먹고 버린 동물들 뼈가 수북하고 주변으로는 발자국이 널려 있었다. 강원도 일대는 사실 남북으로 멧돼지의 이동이 거의 차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돼지 열병에 걸린 멧돼지의 이동을 막기 위해 나라에서 사람 키 높이의 철책을 둘렀다.
한 번도 고향 떠난 적 없는 80 노인
“여기서 사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팔십 년이오.”
“그러면 연세가?”
“팔십이야!”
집사람과 함께 자전거로 주음치리를 가던 중 홍천강을 따라가다가 강변 한적한 민가에서 만난 노인의 유쾌한 대답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태어나서 한 번도 타향살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봄이 되면 북한강을 따라 소금배가 올라오고, 장날 화촌 읍내에 가거나 학교에 가려면 배를 타고 건너던 홍천강은 이 노인에게 어떤 추억으로 기억되었을까.
“해방과 6·25 전란을 다 여기서 당하셨네요?”
“그래도 고향은 안 떠났어. 전쟁에 삼마치까지 피란 간 게 전부지.”
“부산까지라도 내려가신 줄 알았는데 얼마 못 가셨군요.”
“낮에는 비행기로 폭격해서 밤에만 이동하는데 얼마나 갔겠어. 어느 때는 시체를 밟고 가기도 했지. 말도 마!”
강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가 분명 있듯이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며 터를 잡고 사는 곳에는 또한 까닭이 있다. 강을 따라서 들판이 있으니 식량이 나오고, 물길을 따라 물산이 이동하니 당연히 강을 따라서 마을과 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산골도 그와 마찬가지다. 높은 산이나 포개진 산줄기 사이 계곡으로 물이 모여 개울을 이루면 반드시 그 주변으로 마을이 생겼다. 계곡 위로 오를수록 좁아지고 가팔라지지만 나름대로 경작 방법을 터득해 거기에도 사람들이 살았다. 내가 사는 도광터나 지금 가고 있는 주음치리도 그런 마을 중 하나다.
차가워진 계곡물을 담은 다랑구지 벼들은 벌써 잎이 억세고 낟알은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여인의 입술에 바른 루주처럼 붉은 맨드라미와 질박한 백일홍은 대문 앞에 가지런하다. 하눌타리와 힘겨루기를 하는 나팔꽃은 점점 짧아지는 가을 햇빛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는지 그 빛이 유독 강렬했다. 도시든 시골이든, 잘 살고 못 사는 것에 상관없이 집 앞에 꽃을 심는 것이 우리네 어머니들의 변함없는 정서다.
주음치리는 좁은 입구와는 다르게 위로 오를수록 완만한 경사에 농사 터전도 제법 넓었다. 지금이야 주민들 대부분이 도시로 나가고 빈집이 많지만 예전에는 길에 아이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산골에서는 논이 귀해 물을 댈 수 있는 평평한 곳은 모두 논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 보니 논에는 대부분 여러 해 작물인 인삼을 심거나 아니면 아예 축사를 지어 소를 키우는 집이 많다. 그러니 아무리 산골 마을이라도 오히려 축사로 인한 냄새나 도랑 오염이 예전보다 심한 편이다.
새끼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집 주변으로 돌아온 올빼미들이 울기 시작했다. 야밤에 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합쳐진 올빼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비로소 내가 숲 한가운데 있다는 걸 실감한다. 낮보다 밤이 깊어지니 이제 사색의 호흡도 길어질 게 틀림없다.
본 기사는 월간산 10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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