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가 만든 두개의 인류, 지금 우리를 묻다

송주희 기자 2021. 10. 2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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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남자와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손 맞잡고 떠오르는 태양 앞에 섰다.

해가 모습을 드러낼수록 젊은 남자는 의식을 잃어가며 비틀거리고, 노인은 그런 그의 손을 꼭 잡고 지탱해준다.

그러던 어느 날, 평범한 인류(큐리오)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녹스 주재원 살해 사건이 벌어지고, 마을은 봉쇄된다.

그리고 10년 뒤, 조치 해제로 두 인류의 왕래가 재개되며 새로운 인연과 잊고 살던 인연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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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두산·경기아트센터 연극 '태양'
항체 생긴 우월 인류 vs 빈곤 인류 설정
한 태양 아래 경계·차별·공존 질문 던져
독특한 움직임·균형 잡힌 웃음 등 눈길
연극 ‘태양’/사진=유경오
[서울경제]

건장한 남자와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손 맞잡고 떠오르는 태양 앞에 섰다. 해가 모습을 드러낼수록 젊은 남자는 의식을 잃어가며 비틀거리고, 노인은 그런 그의 손을 꼭 잡고 지탱해준다. 행복과 슬픔이 뒤엉킨 얼굴의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난 친구. 한 사람은 건강과 지능, 젊음을 얻었지만, 태양에 버림받은 ‘녹스’의 삶을 택했고, 또 한 사람은 태양 아래 자유롭지만, 가난을 떠안은 ‘큐리오’로 남아 다른 삶을 살아왔다. 녹스로의 개조를 선택했던 남자는 끝내 자신을 세상과 만물의 근원인 태양 앞에 드러낸다.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남자는 행복하다. 해 아래서의 추억을 나눈 친구, 네가 있기에.

두산·경기아트센터가 공동 기획한 연극 ‘태양’은 21세기 초 바이러스로 세계 인구가 급감한 가상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바이러스 항체가 생긴 사람들이 우월한 신체와 지능을 가진 신인류, 녹스로 부상해 정치 경제의 중심이 되지만, 이들은 자외선에 민감해 밤에만 활동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범한 인류(큐리오)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녹스 주재원 살해 사건이 벌어지고, 마을은 봉쇄된다. 그리고 10년 뒤, 조치 해제로 두 인류의 왕래가 재개되며 새로운 인연과 잊고 살던 인연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일본 극작가이자 연출가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작품으로 일본에서는 2011년 처음 선보였다. 한국 공연에선 경기도극단 상임 연출이자 2018년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인 김정이 연출을 맡았다.

연극 ‘태양’/사진=유경오

두 개의 세상을 드러내는 시각적 대조는 단연 돋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각 인류의 특성을 드러내는 움직임이다. 지극히 이성적인 녹스 캐릭터들은 로봇처럼 규칙적인 동작을 반복하는 반면 큐리오는 패턴 없는 즉흥적인 움직임을 선보인다. 여기에 깔끔한 외양과 남루하고 정돈되지 않은 외양이 더해지며 두 인류의 ‘다름’은 더욱 부각된다.

이 의도된 ‘경계와 대비’는 이분화된 우리 삶의 곳곳으로 확장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코로나 이후 국가, 지역, 집단에서 심화한 차별과 배제, 소외다. 10년 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 봉쇄, 항체 등 익숙한 설정은 ‘지금 여기’를 소환한다. 그러나 둘로 갈린 세상은 코로나 세상 이전에도 존재했다. 작가가 원안을 구성할 때 떠올렸다는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속 남과 북일 수도 있고, 작품이 초연하던 해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그 후 빈곤화가 가속한 일본 사회일 수도 있다. 부(富)의 소유에 따라 고층 빌딩과 판자촌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오늘의 모습이 항체의 보유에 따라 ‘고등 인간과 하등 인간’으로 계급화된 연극 속 사회와 무엇이 다를까.

연극 ‘태양’/사진=유경오

흥미로운 것은 극 중 녹스와 큐리오를 딱 잘라 선악의 잣대로 구분하고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녹스 안에도 차별과 우월감에 젖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큐리오의 능력을 높게 사며 그들과 공존하려는 존재도 있다. 큐리오는 가족애, 우정, 사랑 등 이성적 계산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지녔지만, 이들 속에도 폭력과 미움으로 누군가를 해하는 이가 있다. 결국, 둘로 나뉜 세상 속 개개인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캐릭터별 서사와 배우들의 연기, 진중함과 웃음의 절묘한 균형은 이 당연한 진리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극의 처음과 끝엔 차이코프스키의 ‘꽃의 왈츠’가 울려 퍼진다. 같은 태양 아래서 색도 향도, 이름도 다른 너와 내가 뒤엉키고 부대끼며 피고 지는 곳이 이 세상이라 말하는 듯. 2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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