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이방인들』 장마리 "니치보! 실패조차 너무 아름다운 이들을 보라"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1. 10. 20.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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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을 써야 사람들이 소설가로 기억할까. 고민이 깊던 2010년대 초반, S건설 주재원으로 시베리아의 대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10년간 근무했다가 지금은 제재소를 운영하는 지인 ‘크라스코 박’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광활한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북한 벌목공들의 펄펄 끓는 이야기를.

시베리아 소나무의 놀라운 이야기, 소나무를 매개로 알게 된 북한의 외화벌이 벌목공들, 그들의 잇따른 이탈과 러시아인과 조선족 등에게 당하는 이탈 벌목공들, 이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도움, 귀국 후 주재원 경험을 살린 제재소 운영….

소설가 장마리는 바로 쓸 수 없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이르쿠츠크, 띤다 등 배경도, 주요 인물들도, 러시아와 북한말 등이 뒤섞인 언어도 너무 낯설었다. 충분한 공부와 사전 취재가 절실했다. 더구나 아직 작가적 역량 역시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때였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기회가 왔다.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게 됐다. 작품의 배경이던 크라스노야르스크, 띤다 등 시베리아를 찾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북한 벌목공을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시베리아 벌목 현장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토지문화관 등 문학레지던스를 전전하며 집필에 집중한 끝에 장편소설 『시베리아의 이방인들』(문학사상)을 최근 펴냈다. 방대한 스케일에 야성이 장쾌하게 넘치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높고도 고고한 시베리아 소나무 같은.

“소나무는 햇빛이 들지 않는 밑 부문의 가지는 스스로 떨구고, 햇빛을 받기 위해 곧게 자라다가 끝에서 넓게 가지를 펼쳤다. 종훈이 엔진 톱을 켜고 톱날을 휘둘러 잡목부터 쓸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어도 단단히 굳은 얼음 알갱이가 사납게 얼굴을 할퀴었다. 주저앉아 비탈 아래로 나무가 쓰러지도록 삼각형으로 본을 떴다. 톱질을 하고 삼각형 본을 발로 차면서 넘어간다아아! 라고 외쳤다. 50미터에 달하는 소나무가 살 찢어지는 소리를 크게 내며 눈발 위로 쓰러진다. 눈보라가 그칠 때까지 고개를 쳐박고 기다렸다.”(148쪽)

소설은 시베리아 소나무를 들여오는 것만이 가업인 제재소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기고 시베리아를 다시 찾는 준호와 공화국의 외화벌이 벌목공을 관리하게 되면서 시베리아에 온 당 비서의 아들 지석이 벌목공 출신 빅토르의 중개로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지석은 벌목장의 부소장이 저지르는 불법에 맞서 노동자들의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그 일환으로 오락회관을 짓기로 결심한다. 이 과정에서 빅토르의 소개로 준호와 원목 거래를 시작하지만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지석과 준호는 운명 같은, 그럼에도 멋진 실패를 맞보게 되는데.
“부소장은 관행이고, 순리라는 말로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대해. 확실한 대안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어. 타협조차 할 수 없는, 이것이...부소장 개인의 성향인지 공화국이 지닌 체제의 모순인지 모르겠어. 내가 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자신이 없어! 네 말대로 당 비서의 자식이라서, 출신 성분 때문에 혜택을 누리고 살았던 거야.”(169쪽)

장마리는 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머나먼 시베리아로, 그것도 두 번이나 달려가야 했을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생각하도록 하는 근래 보기 힘든 문제작”(방민호 문학평론가)이라고 상찬을 받은 장편 『시베리아의 이방인들』을 펴낸 장 작가를 지난 15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외화벌이에 나선 북한 벌목공들을 리얼하게 다뤘는데.

“북한의 외화벌이는 중국과 러시아 등 곳곳에서 건설노동, 벌목 등 다양하게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진다. 시베리아에선 겨울에는 벌목공으로 일하고, 여름엔 크라스노야르스크, 이르쿠츠크 등에서 건설 노동을 하러 나간다. 벌목은 겨울에만 한다. 나무가 수분을 뱉어내면서 단단하고, 땅이 꽁꽁 얼어 카마즈가 벌목한 나무를 산판에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 전개의 중심에 자리한 시베리아 소나무에 대해 설명해 달라.

“시베리아 소나무는 겨울 추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 수분을 발산한다. 그래서 훨씬 단단하고 색깔도 좋다. 많은 이들이 시베리아 소나무를 쓰고 싶어 하지만, 시베리아 소나무를 조달하는 데에는 한 달 이상이 걸리는 등 시간이 걸린다. 대목장이 좋은 나무에 승부를 건다면 시베리아 소나무를 택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본의 논리에 따라 미국산 더글라스 소나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사실 소나무에 대해 잘 몰라 책을 쓰면서 소나무의 특성을 많이 공부했다.”

―한국의 준호, 북한의 지석과 연인 아샤, 러시아 고려인 빅토르 모두 매력적인 인물인데.

“준호만 실질적인 모델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가공의 인물들이다. 특히 북한의 지석과 연인 아샤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준호의 3대도 재밌는데) 준호의 할아버지, 아버지 이야기 역시 가공한 것이다.”

―그런데 왜 소설의 무게 중심이 준호에서 점점 지석과 아샤로 옮겨가는지.

“처음에는 준호가 잘 됐으면 싶어서 많은 내용을 할애했는데, 나중에는 많이 쳐냈다. 북한의 지석이라는 인물을 살리기 위해서 많이 고민했다. 눈 밝은 독자가 어느 독서토론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 북한이라고 하면 폐쇄적이고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지석은 너무 매력적이고 개혁적이어서 북한에 대해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아샤는 처음 서브 인물로 하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지석의 정신적인 면을 고민하고 깨우치게 하는 역할을 부여해 주고 싶었다. 아샤의 캐릭터를 살릴 때 재미있었다.”
―작품 속 벌목 장면은 매우 생생하고 리얼한데, 어떻게 취재했는가.

“벌목 작업은 북한 벌목공뿐만 아니라 러시아 벌목공들도 한다. 실제로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고 2019년 시베리아에 가서 2번이나 직접 봤다. 시베리아 취재가 제일 어려웠다. 하바로프스크의 레닌 동상 등을 취재할 땐 날카롭게 했다.(‘괜찮다’는 의미의 ‘니치보’, ‘촌놈’을 의미하는 ‘제레벤스키’ 등 러시아말에 ‘날라리’를 의미하는 ‘놀새’ 등 북한말까지 다양한 말도 나오는데) 러시아어는 지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북한말의 경우 드라마나 책을 보고 열심히 공부했다.”

소설에는 야성적인 벌목 현장이나 생생한 러시아어나 북한말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에서 회자되는 러시아시나, 보통의 행진곡풍과 다른 슬픈 민요 「백학(벨르이 쥬라블)」도 담겨 있다. 우우우우 하는 허밍으로 시작하는, 하늘을 날아가는 백조는 죽은 병사들이 변한 존재들인데, 백학들의 비행 행렬에 자신을 위한 한 자리가 비어있다는.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은/ 이국땅에서 전사하여 백학으로 변했다고/…밤안개 속을 뚫고 날아갑니다./ 날아가는 대열 속에 조그만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내 자리는 아닐는지./ 그날이 오면 나는 그들과 함께 저 하늘을 날게 될 것입니다.”(115-116쪽)

방민호 문학평론가는 ‘작품해설’에서 “‘문단적 소설들’에 지쳐 있는 독자로 하여금 눈 크게 뜨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시원스러운 작품이다. 한국문학은 이렇게도 자신의 살과 뼈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극찬했다. 요컨대, 장마리는 차갑디 차가운 이역만리 시베리아에서 실패조차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 젊은이의 펄펄 끊는 이야기를 융숭하게 캐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소설가 장마리의 ‘엄마’는 농촌의 주부였지만, 강건하고 늘 말을 재밌게 했다. 노인정에 가도 인기가 많았고, 어느 곳에서나 웃음을 만들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심지어 농사일을 할 때조차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엄마는 말을, 이야기를 와닿게 하는 이야기꾼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장마리 작가./2021.10.15./하상윤 기자
정말 너무 힘들어, 라고 딸이 한탄하면 엄마는 깨우쳤다. 자꾸 위만 쳐다보니까 힘든 거야, 네 발밑을 쳐다봐야지. 엄마, 나 실수했어, 어떻게 해, 라고 딸이 우울해 하면 엄마가 또 이렇게 달랬다. 미련은 앞 꼭지에서 오고, 지혜는 뒤 꼭지에서 돌아온단다.

1967년 전북 부안에서 농사꾼의 3남2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난 장마리는 2009년 단편소설 「불어라 봄바람」으로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원광대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어떻게 문학의 숲, 작가의 길에 들어섰는지.

“아무래도 엄마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엄마 엄마, 라고 부를 정도로 케미가 좋다. 30대 중반, 시간이 더 지나면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아서 서울의 한 창작아카데미를 들어가서 공부를 했다. 지금도 그 문우들과는 연락을 주고받는다. 안타깝게도 작가로 활동하는 이는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다.”

등단 이후 소설집 『선셋 블루스』(2013)와 엔솔로지 소설집 2권, 부모의 잘못으로 자식들이 겪는 트라우마를 다룬 장편소설 『블라인드』(2018) 등을 펴냈다. 특히 소설집 『선셋 블루스』로 제7회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화예술인 지원프로그램인 상주작가로서, 현재 익산의 ‘행복세상 작은도서관’에서 근무 중이다.

―지역 작가로서 어려움은 없는가.

“지역 작가이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지면을 통한 작품 발표의 기회가 너무 적었다. 그것 때문에 늘 슬프고 속상하다. 원고 청탁을 받지 못하니까, 글을 다 쓰면 『문학사상』에 보내곤 한다. 서울에서 열리는 문학행사에 자주 왔다갔다 할 수도 없고…. 작품만 열심히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글을 쓸 때 리추얼이나 매뉴얼 같은 게 있는지.

“나는 습작 때부터, 일이나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지금도 크게 변화가 없다. 소설, 특히 장편은 엉덩이로 써야 한다. 유명하지 않고 지역 작가여서 그런지, 원고 청탁이 거의 없어서 천천히 생각하고 썼던 것 같다. 지역 작가로서 살아남아야 하기에 어떤 것을 쓸 때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사회성을 담아 쓰려고 노력했다.”

제7회 불꽃문학상을 수상했고 2010년 ‘올해의 문제소설’에도 선정된 그의 첫 소설집 「선셋 블루스」는 제목만 봐서는 낭만적인 로맨스 소설로 보이지만, 새만금 개발과 당시 위도라는 섬에 핵 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앞으로 서사에 집중하는 글을 쓰고 싶다. 또 지역을 매개로 작품 활동을 해보고 싶다.(차기작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이번에 세 남자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 작품은 속옷을 매개로 서울이 아닌 지역 익산과 군산을 배경으로 한 할머니와 어머니, 딸로 이어지는 3대 여성 이야기를 쓰고 싶다.”

탄탄한 서사가 있는 소설, 서사가 좋은 정유정이나 영국 작가 이언 맥큐언 이야기, 소설 작품의 영화화 문제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문 이야기가 숲을 이뤄서 그 끝을 향할 무렵, 예약한 KTX시간을 묻자 오후 4시45분차라고 답했다. 맙소사, 남은 시간은 겨우 20여분.

장 작가와 기자는 서둘러 사옥을 빠져나와 용산역까지 함께 뛰듯 걸었다. KTX 탑승구 입구에서 기자는 남고, 그는 들어갔다. 승강장을 향해 바삐 걷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언뜻언뜻 비쳐지는데. “미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그의 절박함이. 내일 아침, 또다시 ‘不狂不及(불광불급)’이라는 글귀가 쓰인 책상 앞에 앉을 그의 모습이.(2021.10.20)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하상윤 기자, 시베리아 현장 사진=장마리 소설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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