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대한제국 황실이 설계한 식민 수탈 시스템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 10. 20. 03:05 수정 2021. 10. 2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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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근대사가 응축된 군산 기행 ②황제 지주제를 설계한 대한제국
군산 들판. 지평선이 보이는 이 들판은 고려 말 왜구부터 구한말 근대 일본까지 조선을 침략하는 큰 원인이 됐다./박종인

왜구와 군산항 뜬다리

14세기 고려 내륙까지 쳐들어왔던 왜구(倭寇)가 노린 목표는 쌀이었다.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노리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이순신이 방어한 곳도 곡창 지대 호남이었다. 고려 말 호남 세미(稅米)을 모은 진성창이 군산에 있었고, 진성창을 공격한 왜구를 최무선이 물리친 진포해전도 군산에서 벌어졌다.

전북 군산항에는 ‘뜬다리’라고 불리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다. 식민시대 호남평야에서 나온 쌀을 일본으로 싣고 가는 대형화물선 접안시설이다. 간조와 만조 물때에 따라 수면 위로 뜨고 내리는 부잔교다. 당시 대지주들은 고율의 소작료를 받으며 소작농을 통해 쌀을 생산했고, 생산한 쌀은 많게는 생산량의 절반을 일본으로 팔았다. ‘식민지 지주제’라는 이 토지 시스템은 대한제국 황실이 실질적인 설계자였다./박종인

그 군산항에는 뜬다리가 있다. 부잔교(浮棧橋)라고도 한다. 왜구 이후 마침내 조선 침략에 성공한 일본이 만든 대형 콘크리트 접안 시설이다. 1926년 이후 ‘왜놈들이 우리의 고혈을 빨아 먹기 위하여 쌀을 실어 내갈 목적으로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은’ 다리다.(1948년 11월 30일 ‘군산신문’) 해방 뒤에는 ‘뻣정다리처럼 삐쭉하니 병신이 되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앞 신문)가 됐지만, 뜬다리는 간조와 만조 수위에 따라 시설 전체가 오르내릴 수 있는 첨단 구조물이었다.

군산은 일본이 호남 지역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항구도시였다. 그 쌀을 군산으로 운반하기 위해 전주~군산 도로(1908)를 만들었고 익산~군산 철도(1912)를 만들었다. 철저하게 쌀을 위해 만든 도시였다. 그리하여 해방이 됐을 때 군산은 ‘미처 몇 달 가지 못해 선박 출입이 전연 없이 말할 수도 없이 한산해진’ 항구가 돼 버렸다. 지금 군산은 전쟁과 전후 눈물 나는 노력으로 재탄생한 도시다. 그래서 지금 군산항 풍경 속에는 저 끔찍한 기억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일본이 어떻게 자기네 식민지 조선에서 쌀 ‘수탈’에 성공했는지 그 과정을 보기로 하자.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일본 미곡 수탈의 설계자는 대한제국이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7. 근대사가 응축된 군산 기행

②황제 지주제를 설계한 대한제국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 원칙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 사업 목적은 조선의 토지 실태 파악 및 근대적 소유제도 확립이었다. 일찍 근대화한 일본과 동질 구조를 만들어야 지배가 용이했다. 그리고 지배 구조에 가장 기초적인 요소는 땅이었다. 특히 봉건 지주-소작농이 역사적으로 결합돼 있는 농지는 말 그대로 접수 대상 0순위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은 농촌 인구가 급감하고 쌀 소비량이 폭증하던 시기였다. 이미 값싼 조선 쌀을 수입하던 일본은 식민지화와 함께 조선을 식량 기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한 일본은 곧바로 토지조사에 들어가 국유지 실태를 파악했다. 이를 토대로 1910년 토지 측정과 서류 조사를 통해 조선 토지 실태를 파악했다. 그때 만든 토지대장이 21세기 대한민국 토지 측량에 여전히 쓰인다. 이때 통감부와 총독부가 세운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 법 체계에 없는 관습적인 조선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조사가 완료돼 국유화된 토지에 대해 행정적 이의 제기는 허용하지 않는다.

관습적 소유관과 행정적 이의 제기는 모두 일본 본국에서는 법적으로 허용된 농민의 권리이고 구제 방식이었지만 조선에서는 허용하지 않았다.(남기현,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성립된 토지소유권의 성격 검토’, 개념과 소통 27권0호, 한림과학원, 2021)

이런 원칙으로 이뤄진 토지조사 결과 대규모 토지가 국유화됐고, 그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대지주에게 불하돼 농장으로 변했다. 고율의 소작료를 내며 소작인들이 거둔 쌀은 군산 뜬다리 부두를 거쳐 쌀값 경쟁력이 높은 일본 시장으로 건너갔다. 저가인 조선 쌀 수입에 일본 농민들 반발이 심했지만 조선에 있는 대지주들은 거부(巨富)를 쌓았다. 이런 미곡 생산 시스템을 ‘식민지 지주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행정적 이의 제기가 불가능하고 관습적 소유권을 부정한 토지 수용은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정답은 대한제국이다. 더 정확하게는 대한제국 황실이 그 설계자다.

군산지역 대지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의 금고 건물. 미곡 생산과 수출이 만든 거부(巨富)의 상징이다./박종인

구한말 국유지 조사

봉건 조선 농업은 이러했다. 국가와 왕실, 민간 대지주는 자기 땅을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았다. 땅 없는 농민은 그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냈다. 대개 소작료는 병작반수(並作半收), 수확한 곡식 절반이었다.

1894년 벌어진 동학농민전쟁은 그 지주제의 모순과 탐관오리의 부패가 원인이었다. 가혹한 소작료와 더 가혹한 세금과 부패에 질린 백성은 세금 포탈을 위해 땅을 숨겼고, 소작농은 고향을 벗어나 유민(流民)으로 떠돌았다.

1894년 8월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해 갑오개혁정부는 국유지로 분류된 땅에도 세금을 매기기로 결정하고 전국에 있는 국유지 조사에 착수했다. 각 역원(驛院) 소속 역토(驛土)와 각 관청이 보유하고 있는 둔토(屯土), 왕실 소유 궁방전(宮房田)이 대상이었다. 주민이 농사를 짓고, 해당 역과 관청이 소작료를 받는 땅들이었다. 조선정부는 500년 동안 면세(免稅) 대상이던 이들 땅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1895년 9월 처음 현장에 나간 관리들이 조사를 해보니, 어떤 국유지들은 엉뚱한 사람들이 지주(地主)라며 서로 땅을 사고팔고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를 받고 있지 않은가. 몇 백 년 건드리지 않았던 땅에 자연발생적으로 주인이 생기고 땅 거래가 이뤄지고 있던 것이다. 매매계약서가 ‘권축(卷軸·두루마리)을 이룰 정도로’ 몇 백년 대대로 거래를 해온 땅도 있었다.(배영순, ‘한말 역둔토조사에 있어서의 소유권분쟁’, 한국사연구 25, 한국사연구회, 1979)

갑오개혁 정부의 토지개혁

갑오개혁 정부가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내건 원칙은 ‘어떤 땅이든 경작하는 사람이 세금을 낸다’였다. 언뜻 보면 ‘경자유전’ 원칙과 유사하게 읽히지만, 실질은 매우 달랐다.

국가 소유로 확정된 땅에 농사짓는 농민은 그때까지 각 관청에 내던 소작료와 함께 중앙정부에서 납세 의무를 부여받았다. 이중과세라는 농민들 항의에 정부는 “소작료는 해당 관청에 내는 것이고 세금은 중앙 탁지부에 내는 게 마땅하다”며 이중과세 주장을 일축해버렸다.(1896년 11월 ‘각도각군소장보고’ 3책 ‘개성부송서면 사포둔민의 소장’, 배영순, 앞 논문 재인용)

대한제국의 역주행

1897년 3월 아관파천에서 복귀한 고종이 명을 내렸다. “토지를 군부(軍部)로 이관하라.”(1897년 3월 10일 ‘고종실록’) 군부는 민씨 척족을 비롯해 고종 최측근이 도맡아하던 부서였다. 그리고 국가가 지주(地主)로 변신한다.

군부는 현금으로 받았던 소작료와 세금을 다시 곡식으로 받는 도조(賭租)로 징수 방식을 바꾸고 소작료 또한 민간 농지 소작료에 달할 만큼 인상해버렸다. 쌀값이 폭등하고 인플레로 화폐가치가 하락하자 시세차익을 노린 조치였다.(김양식, ‘대한제국기 역둔토에서의 항조 연구’, 역사학보 131, 역사학회, 1991)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에 등극했다. 3년 뒤 고종은 국유지 담당 부서를 내장원(內藏院)으로 변경했다.(1900년 9월 30일 ‘탁지부각부원등 공문래거안’ 3책, 배영순, 앞 논문 재인용)

‘황제 지주제’의 완성과 내장원

내장원은 황실 금고를 담당하는 부서다. 부서장인 내장원경은 이용익, 고종 최측근이다. 이용익은 돈을 찍어내는 전환국장(1899), 탁지부협판(1900), 탁지부대신서리(1901), 토지 조사 및 등록 사업부서인 지계아문(1901)과 양지아문(1902) 부총재를 연달아 혹은 동시에 지낸 인물이다. 대한제국 재정을 한 손으로 움켜쥔 사람이었고, 바로 그 사람이 황실 금고를 지키는 내장원경이었다. 개혁정부가 추진했던 토지개혁이 농상공부에서 탁지부로, 군부, 그리고 마침내 황실로 그 주체가 바뀐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 진행된 이 토지개혁을 ‘광무양전’이라고 한다.

1900년 광무양전을 위한 사전조사 원칙(‘사검겸독쇄장정’)에는 이렇게 규정돼 있다.

첫째 기존 조사와 무관하게 토지를 남김없이 재조사할 것, 둘째 징세를 거부하는 자는 장을 때려 옥에 가두고 납세를 독촉할 것(杖囚督捧·장수독봉), 셋째 도조가 낮은 곳은 농민을 지도한 뒤 인상할 것.(이윤상, ‘대한제국기 황실 주도의 재정운영’, 역사와 현실 26권, 한국역사연구회, 1997)

과중한 징세에 전국적으로 납세를 거부하는 민란이 벌어지자 1902년 고종은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2년 뒤 고종은 “상납이 부실하다”며 감독관을 재파견했다.(‘훈령조회존안’ 54책 1904년 8월 1일 훈령 각도관찰사, 이윤상, 앞 논문 재인용)

그렇게 국유화된 토지에서 세금과 소작료가 징수됐다. 1896년 5만1000냥이었던 내장원 토지세 수입은 1903년 500만냥이 넘었다. 500만냥이 넘는 그 돈은 모두 국가가 아닌 황실로 귀속됐다. 국가 재정 담당 부서인 탁지부는 ‘당장 한 달 경비가 부족해 집부허산(執簿虛算·장부만 보고 헛계산)을 하며 벌 몇 마리가 빈 벌집 지키듯 할 정도’로 금고가 비어 있었다.(1898년 12월 28일, 1899년 3월 1일 ‘황성신문’)

황제 지주제와 식민지 지주제

근대 소유권 확립이 아니라 ‘황제의 지주권을 명확히 하기 위한’ 조사였다. 이 과정에서 위에 언급한 ‘두루마리로 쌓아놓은’ 민간 매매 문서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유지에 관습적⋅역사적으로 존재하던 지주들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항의하는 농민에게 내장원은 ‘이미 조사가 집행됐으므로 사유지라는 주장은 부당함’이라고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배영순, 앞 논문) 수백년 국유지를 거래하며 살던 농민들은 국가 아니 황제의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내장원은 경리원으로 바뀌었고, 통감부와 총독부는 그 틀대로 식민지 지주제를 완성했다. 여기까지가 군산에 뜬부두가 서게 된 역사적 경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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