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화이부동]'흙수저 우대'는 가난의 존중과 배려인가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입력 2021. 10. 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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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10월 초순 때아닌 ‘어린 시절 옷 사진’ 공방이 있었다. 이재명 캠프의 대변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재명과 윤석열의 어린 시절 사진을 올린 뒤 “이재명의 옷과 윤석열의 옷 사진을 보며 생각은 각자의 그릇만큼”이라는 글을 적었다. 이는 부잣집 아이 같아 보이는 윤석열의 어린 시절 사진을 이용해 이재명이 흙수저 출신임을 강조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그러자 홍준표 캠프의 대변인은 “가난을 ‘스펙’, ‘패션’으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취약계층을 욕보이는 일 아닐까”라고 비판했다. 시사평론가 김수민은 “이재명 쪽은 조국을 속으로 싫어하나 봄”이라는 짧은 글과 함께 조국의 어린 시절 사진을 공개했다. 이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한 사진 속 조국이 윤석열보다 더 유복하게 자랐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이재명 사진의 원본은 ‘컬러’였음에도 ‘흑백’으로 올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또 한번 작은 논란이 일었지만, 이 또한 이재명의 가난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기 위한 것이었을 게다.

이 공방은 웃어 넘겨도 좋을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국사회와 한국인에 대해 의외로 많은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가난 경험을 강조하는 걸까? 부자보다는 서민 유권자가 더 많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해보련다.

누구나 다 인정하겠지만, 정치인이 흙수저 출신이라는 건 큰 정치적 자산이 된다. 아니 ‘훈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대선 후보들 가운데 최고의 흙수저는 단연 이재명이다. 홍준표도 그 자신의 말처럼 “뼛속까지 흙수저”였지만, 이재명의 수준엔 미치지 못한다. 이재명은 공장 생활 6년 동안 4년을 남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겨우 13세의 나이에 소년공으로 세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가난은 멸시와 혐오의 대상인데
정치 쪽선 최상급 얘기로 급반전
‘인간승리’ 이미지로 소통보단
빈곤층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각자도생의 관성 균열 내줬으면

이재명의 지지자들이 쓴 이재명 예찬서들엔 어김없이 이재명이 겪은 최악의 가난과 그걸 이겨낸 이재명의 불굴의 투지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 ‘인간승리 스토리’에 호감을 갖는 건 비단 이재명 지지자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겪어왔거나 그 경험을 가족을 통해 전수받은 한국인들은 그런 스토리를 사랑하며, 이는 대중문화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드라마 작가들이 말하는 성공 공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승리’다. 시청자들은 “가진 것 없는 사람이 잘되는 이야기”(김정수), “신분상승을 다룬 성공 스토리”(정하연)를 사랑한다. 대중은 삶 자체가 성공 스토리인 연예인들을 우대한다. TV의 예능 토크쇼에선 성공한 연예인들이 나와 무명 시절 고생담을 이야기하는 게 주요 메뉴가 되었다. 그래서 급기야 한 어린이는 아버지에게 “아빠, 연예인이 되려면 어릴 때 반지하 방에 살아야 해?”라고 묻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렇듯 ‘가난 경험’을 우대하는 대중의 정서적 토대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앞서 거론한 ‘어린 시절 옷 사진’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게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과거의 가난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한국인들이 어쩌자고 현재의 가난한 사람들에겐 등을 돌리는 걸까? 아니 왜 모멸까지 하는 걸까? 대중의 일상적 영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각종 ‘갑질’ 사건을 보라.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어떤 곳에 사느냐에 따라 벌어지는 가난 차별은 징그러울 정도로 심하다. 2020년 3월 한겨레21이 서울에 300가구 이상 공급된 공공임대아파트 158개 단지와 서울시 616개 초등학교 통학구역을 한 달간 분석한 기사에 따르면, 임대아파트 아이들에게 쏟아진 차별과 혐오의 시선, 분리와 배제의 시도가 매우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임대아파트뿐만이 아니다. 2019년 11월 사회비평가 박권일은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어느 초등학교 옆을 걸어가다 들었다. ‘야, 걔 빌거잖아. 차도 엄청 구림.’ ‘진짜?’ 그 뒤로도 뭔가 재잘댔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빌거’란 말이 유리 조각처럼 콕 박혀서, 종일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빌거’ 또는 ‘빌거지’는 ‘빌라 사는 거지’다. ‘월거지’는 ‘월세 사는 거지’다…. 한국사회에서 계급은 신분을 넘어 인종적 표지가 되었다.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 냄새’는 그렇게 ‘자연화’된 계급차별에 대한 하이퍼리얼한 묘사였다. 가난한 이에 대한 차별과 모욕은 이미 인종차별처럼 벌어지고 있다.”

이런 사례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정치라고 하는 공적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한다. 대선 후보에게 이렇다 할 ‘스토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건 성패를 결정하는 요인처럼 여겨지는데, 이런 스토리의 최상급이 바로 가난 경험이 아닌가. 이 두 개의 다른 얼굴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흙수저 출신 우대’는 ‘가난 존중과 배려’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개천에서 난 용’의 스토리이다. 가난 탈출을 위해 국민적 차원에서 ‘전쟁 같은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 가난은 멸시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감정이 강할수록 오히려 ‘개천에서 난 용’의 스토리 파워는 강해진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모욕을 없애거나 개선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난 경험이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국정운영의 동력이 된다는 것도 꼭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개천에서 난 용’이었던 역대 대통령들을 보라. 그들은 거의 대부분 개천을 배신했으며, 이는 개천의 대명사로 통하는 지방의 소멸 현상이 그걸 잘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개천에서 더 많은 용이 나와야 한다고 외쳐봐야 지방소멸만 가속화할 뿐이다. 이게 바로 지난 반세기 넘게 우리의 정신과 몸에 각인된 각자도생 문법이다.

최근 동아일보의 통계청 자료 분석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영양실조와 영양결핍으로 숨진 사람은 345명이었다. 코로나19 유행 전인 2019년(231명)의 1.5배로 늘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사망자와 죽음 직전의 상태에까지 이른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결코 무심하게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다. 이는 ‘흙수저 출신 우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아닌가.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윤홍식은 지난 8월에 출간한 <이상한 성공: 한국은 왜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을까?>에서 노인 중 절반이 빈곤에 신음하고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의 합계출산율을 기록할 정도로 한국사회가 불행에 빠진 이유를 탐구했다. 그는 “한국이 이상한 선진국이 된 이유는 한국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답을 제시한다. 즉, 지금 우리의 불행이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성공의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로 대변되는 가난 탈출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과 집념 덕분이었다. 그 방식은 각자도생의 ‘전쟁 같은 삶’이었다. 고성장 시대가 끝나면서 그마저도 어렵게 되자 희망으로 극복해온 불행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게 아닐까?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적인 성공은 자랑스럽게 생각할 일인 동시에 부끄럽게 생각할 일이다. 드라마가 탁월한 예술적 감각으로 사회현실을 포착하고 고발한 문화적 역량은 자랑이지만, 그 사회현실이 우리가 이룬 ‘이상한 성공’의 결과라는 점은 수치다.

한국인처럼 ‘우리’라는 말을 즐겨 쓰는 사람들도 없지만, 동시에 한국인처럼 ‘나’에 충실한 사람들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보다는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의 관점과 ‘나’의 관점의 균형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나’의 문제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 옷 사진’ 사건의 경우처럼 ‘인간 승리’의 이미지 소통보다는 빈곤층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에 관심을 가지면서 각자도생의 관성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각자도생형 평등주의는 우리의 삶을 전쟁으로 만들면서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호구지책 문제로 인해 투표할 시간조차 없는 빈곤층은 정치인들의 관심 밖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흙수저 출신 우대가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는 쪽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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