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다른 성 써도 유대감 안 사라져"..일본 총선의 뜨거운 화두가 된 '선택적 부부별성제'

박은하 기자 입력 2021. 10. 19.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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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결혼 전 이름 ‘통칭’으로 쓴
히구치 모녀 3대의 사연 주목
정치권, 찬성 여론에 힘입어
야당들 ‘도입’ 공약 내놨지만
자민당은 보수파 눈치 ‘침묵’

일본 센다이에 사는 히구치 시즈에(91)는 어릴 적 아버지가 일찍 사망했다. 결혼할 때가 되자 시즈에의 어머니는 사위가 처가의 성(姓)을 따르길 원했다. 가족은 같은 성을 써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즈에의 예비 남편은 난색을 표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인 1875년 성씨 사용을 의무화했고 1898년 부부가 같은 성을 쓰도록 했다. 시즈에는 결국 남편 성을 따라 쓰게 됐고 어머니에게서 원망을 들어야 했다.

시즈에의 딸이자 현역 센다이시 의원인 히구치 노리코(62)는 23년째 결혼 전 이름을 ‘통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1983년 공무원이던 그는 결혼을 앞두고 평생 써오던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상실감에 빠졌다. 1999년 공무원도 직장에서 통칭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결혼 전 이름을 되찾았다. 그는 2011년 시의원으로 처음 당선됐을 때 당선증에 법적 이름과 통칭을 최초 병기한 사례로 주목을 받았다. 시의원이 된 후에는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히구치 의원의 딸(34) 역시 직장에서 결혼 전 이름을 통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고객을 응대해야 해 이름표를 달고 일하는데 이름이 바뀌면 사생활을 캐묻는 사람이 많아서였다. 통칭을 쓰는 어머니와 성이 달랐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딸 역시 어머니와 함께 선택적 부부별성제를 지지하는 집회에 참여한다.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 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9일 ‘성씨 변경으로 고생한 3대, 부부별성은 다양성의 상징’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히구치 모녀 3대의 이야기를 주목했다.

아사히신문은 “수십년째 선택적 부부별성제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정치권이 이를 실현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며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인정할 것인가 하는 상징적인 주제가 됐다”고 보도했다. 이날부터 일본 각 정당은 후보를 등록하고 31일까지 12일간의 공식 선거전에 돌입한다.

일본에서 선택적 부부별성제에 대한 정치권의 움직임과 여론은 괴리 현상을 보여왔다. 2001년 내각관방부 여론조사에서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 찬성 여론(42.1%)이 반대 여론(29.9%)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2002년 노다 세이코 의원(현 저출산 담당상)을 중심으로 자민당 내에서 논의가 불 지펴졌지만 법 개정으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2013년 출범한 아베 신조 2차 내각 시절에는 아베 전 총리가 반대 의사를 보여 논의 자체가 멈췄다. 사법부도 국민의식과 달랐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2015년 부부동성제 규정은 합헌이라고 판단하면서 “국회에서 논의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지난 6월 일본 최고재판소는 “부부가 다른 성을 쓰면 정이 없어진다”며 재판관 15명 중 11명의 다수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선택적 부부별성제를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2018년 출범한 ‘전국진정액션’은 지방의회에 선택적 부부별성제의 국회 심의를 요구하는 의견서를 낼 것을 요구했고 전국 290개 의회가 의견서를 가결했다. 최근에는 기업인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보기술(IT) 기업 사이버우즈의 아오노 요시히사 대표가 이끄는 ‘선택적 부부별성제를 촉구하는 비즈니스 리더 모임’이 제기한 행정소송에는 600명 넘게 참여했다. 스가 요시히데 정권 들어 자민당에서도 선택적 부부별성제를 조기 실현하는 의원연맹이 결성되는 등 비로소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번 총선에 참여하는 야당들은 모두 선택적 부부별성제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내놓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일본유신회는 결혼 전 성을 사용하는 이름에도 법적 효력을 부여하는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을 공약으로 제시했으며, 집권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이루는 공명당도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에 찬성한다.

하지만 자민당은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11일 국회 질의에서 “계속 제대로 논의해야 한다”고 즉답을 피했다. 부부별성이 가족의 유대감을 잃게 한다는 자민당 내 보수파 입장을 인식한 발언이다.

일본인들의 소셜미디어에는 “다른 성을 쓰면 가족 간 유대감이 없어진다면 결혼한 딸은 가족이 아닌가”와 같은 말이 올라오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동질성이 높은 일본 사회와 이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을 방치하면 사회는 격변의 시대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잃고 저출산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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