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 - 루시앙 골드만 [김남일의 내 인생의 책 ③]
[경향신문]
꼭 읽으려고 책을 사는 건 아니다. 여름날 땡볕 쏟아지는 툇마루에서 베개 대신으로 쓰이는 것도 책의 장한 기능 중 하나이겠지만, 옆에 끼고 다니며 폼을 잡는 것도 제법 훌륭한 기능이다. 천하의 시인 김정○ 형님은 종종 ‘난닝구’ 바람에 백과사전만 한 불어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서울 한복판에 등장했다. 인류가 지하철에서 아직 책을 읽던 시절의 일이니, 책 제목은 꽤 중요했다. 가령, <숨은 신>이라면?
대체 누가 그토록 오만한 제목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책의 속표지에 내가 이렇게 적어놓았다.
‘예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모더니스트였다. 루카치도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던 시절은 행복하였노라” 말하던 시절의 루카치부터 받아들였다. <소설의 이론> 어디에서도 경직된 혹은 노회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모습은 찾아낼 수 없다. <숨은 신> 역시 문학작품의 구조를 사회계급의 의식구조와 견주고 있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분명해지는 건 파리의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동유럽 출신 한 망명자의 모습이었다. 그 시절 내가 꿀 수 있었던 꿈의 최대치가 딱 그 정도였으리라. 어쨌든 유신의 서슬은 참으로 시퍼렜다. 잘못을 따지자 해도 신이 숨어버린 시대, 게다가 무신론자로서 내가 할 일은 그저 견뎌내는 것밖에 없었다.
<숨은 신>은 지금 읽어도 어려운 문학이론서다. 갓 스무 살을 넘긴 내가 제대로 읽었을 리 없다. 다만 고맙게도 책에는 밑줄을 칠 만한 구절이 넘쳐났다. 내 마음을 가장 휘어잡은 건 대개 이런 종류였다.
‘비극적 인간은 절대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단지 희망을 세계에 두지 않을 뿐이다.’
그나저나 내가 읽은 <숨은 신>은 발췌 번역본이었다. 지금까지도 완역본은 만나지 못했다.
김남일 | 소설가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네이버, 소프트뱅크에 ‘라인’ 경영권 뺏길판…일본 정부서 지분 매각 압박
- “육군은 철수...우린(해병) 한다” “사단장님이 ‘하라’ 하셨다”···채 상병 사건 녹취록 공
- 폭발한 이천수, 협회에 돌직구 “황선홍 감독, 정몽규 회장, 정해성 위원장 다 사퇴!”
- 나경원, ‘윤 대통령 반대’ 헝가리식 저출생 해법 1호 법안으로···“정부 대책이 더 과격”
- 공수처, ‘이정섭 검사 비위 폭로’ 강미정 조국혁신당 대변인 조사
- “매월 10만원 저금하면 두 배로”…다음주부터 ‘청년통장’ 신청 모집
- 아동 간 성범죄는 ‘교육’ 부재 탓···사설 성교육업체에 몰리는 부모들
- [초선 당선인 인터뷰] 천하람 “한동훈은 긁어 본 복권…정치 리더로서 매력 없어져”
- 니카라과, “재정 악화” 이유로 한국 대사관 철수 통보
- 현대차, 차량 내부 20℃ 이상 낮춰주는 틴팅필름 개발…‘뙤약볕’ 파키스탄서 실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