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언어탐방] 로맨스: '사랑놀이'

한겨레 2021. 10. 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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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언어탐방]로맨스는 사랑이라기보다 '사랑놀이'다. 그것이 과정과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더욱이 그 본질은 놀이의 성격을 지닌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놀이를 못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 그것은 일말의 조율 능력도 갖지 못한 열정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ㅣ철학자

새벽이라서 공항은 한산했다. 공항 주변에는 안개가 엷게 끼어 있었다. 도착 출입구의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는 사이로 음습한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김포에서 꼬박 하루 24시간 하고도 3시간이 더 걸려 도착한 로마공항은 전형적인 유럽 초가을의 스산함 그 자체였다. 난생처음 국제선을 타고 바다 건너 이국땅을 밟은 유학생에게 43년 전 로마공항의 풍경은 따스한 환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중 나온 사람도 없었던 나는 로마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앞면 유리창에 대문자로 로마(ROMA)라고 쓰인 셔틀버스를 탔다. 전망 좋은 운전석 옆 맨 앞자리에 앉았다. 동이 트면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대도시 외곽도로를 달리는데도 주변 풍경이 푸른 전원을 지나는 듯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전방을 주시했다. 순간 뭔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아모르(AMOЯ)! 로마의 ‘역상 필체’가 내 눈을 붙잡았다. 차창 밖에서 보았던 글자를 안에서 보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아르’(R) 자는 대칭성이 없어 좀 이상했지만 오히려 시선을 더욱 끌었다. 그건 이탈리아어로 사랑이라는 뜻 아닌가. 로마의 오래된 별칭은 ‘영원한 도시’이지만, 그때부터 내게는 사랑의 도시가 되었다.

나는 로마를 거꾸로 읽어 다른 속뜻을 찾아냈지만, 로마라는 단어 그 자체에서 유래한 말들은 참 많다. 우리 외래어가 된, 로망, 로맨스, 로마네스크, 로맨틱, 로맨티시즘, 로마니아 또는 루마니아라는 나라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 언어에 스며들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로맨스(romance)는 우리 일상에서 사랑의 의미와 혼용되고 있다. 로맨스의 머리글자를 넣어 만든 ‘추악한 사자성어’도 있다. 그 사자성어의 감옥에서 이 아름다운 말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도 그 뜻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영어 로맨스에 영향을 준 프랑스어 로망(roman)은 로마 시대 라틴어에서 갈라져 나온 서구 언어들을 가리키다가 이어서 그 언어로 쓴 이야기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들은 환상적인 사랑과 모험을 소재로 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또한 특별한 의미의 사랑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렇게 로맨스 문학은 시작되었는데, 이를 유포하는 데에는 중세의 기사이자 음유시인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기사도 이야기를 섞은 서정성 짙은 연애시를 지어 부르며 유랑했다.

음유시인 기사의 충성심은 왕과 영주뿐만 아니라 궁정과 성안의 귀부인을 위한 것인데, 귀부인은 충성의 대상이자 또한 애정의 대상이다. 그녀의 신하가 된 시인 기사는 시와 노래로 귀부인을 위로하고 마상 창 시합으로 즐겁게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한다. ‘금지된 관계’ 속에서 이런 애정은 바로 그 금지에 의해 더욱 커지고 귀부인은 기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지만, 기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정을 준 사람과의 결합이라는 환상은 늘 유예되어 다가설 수 없는 존재로 비치면 비칠수록 그녀는 점점 더 미적으로 승화된다. 그지없이 고결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문학사가들은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이런 개념이 중세 자체의 완성된 산물이라기보다는 중세를 낭만적으로 해석한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세를 깊이 연구했던 움베르토 에코도 그 시대에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열정과 달콤한 불행의 근원으로 이해되는 사랑이 발명되었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 결과 시와 소설 그리고 오페라에 이르기까지(오늘날에는 게임의 서사까지) 근대 예술이 그곳으로 이야기의 주거지를 옮겼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서 관점을 약간 돌리면 우리는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시대에 발명된 것은 사랑이 아니라 특별한 연애 방식이기 때문이다. 서구 언어에서 로맨스를 ‘사랑’(love)과 달리 특별한 뉘앙스를 담아 쓰는 이유가 여기 있다.

로맨스의 본질은 연애의 방식과 과정에 있다. 여기에는 기사도 정신과 궁정의 예법, 육체적 결합이 반드시 전제되지는 않는 애정 등이 섞여 들어가 있다. 로맨스는 사랑이라기보다 ‘사랑놀이’다. 그것이 과정과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더욱이 그 본질은 놀이의 성격을 지닌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놀이를 못한다. 현대의 낭만주의적 해석은 이런 점에서 놀이의 요소를 놓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행동은 거의 전쟁에 비유할 수 있다. 치열하고 배타적이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 그것은 일말의 조율 능력도 갖지 못한 열정이다. 이에 비해 로맨스는 제어되고 조율된 ‘전투놀이’라고나 할까? 로맨스는 사랑에 관한 일종의 가상놀이다.

음유시인의 존재는 인간의 욕망과 그 표현이 얼마나 엉뚱하고 그야말로 다양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이야기와 노래와 놀이로 표현하고자 한다. 가상현실로서의 사랑, 곧 음유시인의 로맨스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음유시인들이 시도했던 것은 연애의 방식이며, 그들에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연애의 한 방식이다. 이루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이루어지지 말아야 할 사랑을 위해 상대를 연모했던 시인 기사들에겐 연애의 과정 그 자체가 모험이자 담대한 목적이었다.

로맨스와 불륜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다. 로맨스는 불륜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맨스는 시인 기사가 그랬듯이 불륜과 거리두기를 지난하게 시도한다. 로맨스와 불륜은 두 벼랑 위에 서 있는 각자 다른 암석이다. 둘은 쉽게 치환되지 않는다. 삶의 진정성을 잃은 자들만이 그런 치환을 시도할 뿐이다. 그들에게 로맨스와 불륜은 동전의 양면이며 천박한 사자성어의 틀 안에 함께 가둘 수 있는 것이 된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로맨스의 과정이 불륜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진정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과정을 중요시하는 만큼 의도 역시 소중하게 여긴다. 저 유명한 <아서왕 이야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아서는 타인의 로맨스를 불륜으로 악마화하지 않는다. 원탁의 기사 랜슬롯은 자신의 불륜을 로맨스로 정당화하지 않는다. 귀네비어는 자신이 맺은 모든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이 비극적 아름다움 또는 아름다움의 비극임을 가슴속 깊이 받아들일 뿐이다. 그들은 고통의 심연에서 관용과 배려를 배웠다.

이십대 청년이 로마라는 글자의 역상에서 사랑을 발견했다면, 일흔살 고비를 넘고 있는 노인은 지금 로마라는 글자를 순리대로 읽는다. 로마, 그리고 로마가 낳은 환상적 언어 로맨스의 의미를 다시 새긴다. 나는 타인을 비난하고 자신을 미화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타인을 관용하고 배려하는 일상을 실천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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