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성당은 도살장이었다

한겨레 2021. 10. 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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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제노사이드의 기억 아프리카 르완다 _02
후투족 민병대의 공격이 거세지자 투치족 남성들은 집을 버린 채 니아마타 초등학교 안으로 집결했고, 여성과 아이들은 성당을 피난처로 삼았다. 르완다 국민의 절반 이상은 가톨릭 신자다. 성당만큼은 후투족의 공격을 막아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후투족 성직자들은 성당을 찾은 투치족을 외면했을뿐더러 후투족 민병대와 함께 대량학살에 가담하기도 했다.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 시내에서 남쪽 30㎞ 방면에 있는 니아마타 제노사이드 기념관은 1994년 대량학살 당시까지만 해도 성당이었다. 니아마타/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사실이다.

제노사이드 연재에 앞서 학살 터로 쓰인 르완다의 몇몇 성당 관련 사진 파일을 하나하나 다시 들춰봐야 했다. 그 시간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괴롭고 힘들었다. 끔찍했던 살육의 흔적과 희생자에 얽힌 가여운 기억이 문자와 함께 되살아나는 것 같아 한층 더 고통스러웠다.

르완다 대량학살 당시 투치족은 총구와 마체테(machete: 밀림에서 주로 쓰는 70㎝ 정도 길이의 날이 넓은 칼)를 피해 평소 믿고 의지했던 동네 성당으로 몸을 피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맞닥뜨린 투치족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반면 칼자루를 쥔 후투족한테 성당은 단시간에 좀 더 많은 투치족을 절멸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장소일 뿐이었다. 그렇게 르완다 전역에서 100일 동안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 1만명꼴이다. 대량학살이 시작될 무렵 르완다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투치족은 사람이 아닌, 그저 길바닥의 바퀴벌레일 뿐이라고 줄기차게 선동했다. 르완다의 가톨릭 성당과 후투족 성직자마저도 절박한 마음으로 신을 찾은 투치족을 외면했다.

대량학살 장소였던 르완다의 성당 가운데 수도 키갈리 시내에서 남쪽 30㎞ 방면에 있는 니아마타(Nyamata) 제노사이드 기념관을 2014년 4월6일 찾았다. 이곳에서도 1994년 4월6일 후투족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암살된 직후, 투치족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먼저 4월7일,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니아마타 지역의 투치족 주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투치족이 많아 그들도 스스로 방어에 나서봤으나 역부족이었다. 후투족 민병대의 공격이 거세지자 투치족 남성들은 집을 버린 채 니아마타 초등학교 안으로 집결했고, 여성과 아이들은 성당을 피난처로 삼았다. 르완다 국민의 절반 이상은 가톨릭 신자다. 성당만큼은 후투족의 공격을 막아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후투족 성직자들은 성당을 찾은 투치족을 외면했을뿐더러 후투족 민병대와 함께 대량학살에 가담하기도 했다.

후투족 민병대는 성당 안에 투치족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발사했다. 그런 뒤에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면 마체테와 손도끼를 이용해 완전히 숨통을 끊었다. 4월14일부터 16일까지 3일 동안 니아마타 성당 안에서 약 5천명의 투치족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교회에서 탈출한 몇 안 되는 투치족은 인근 덤불과 들판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들마저도 뒤를 쫓아온 후투족 민병대에 발각돼 모조리 살해당했다. 니아마타 성당 안팎에서 1만명 이상의 투치족이 죽었다. 르완다 정부는 학살 터였던 가톨릭교회를 1997년 4월 폐쇄하고 대량학살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관으로 바꾸었다.

기념관 안의 조명은 어두웠다. 빛이 너무 부족해서 카메라의 아이에스오(ISO) 감도를 1600 이상으로 올렸다. 여전히 캄캄했다. 카메라 셔터는 더 많은 빛을 받아들이려고 느리게 열리고 천천히 닫혔다. 사진이 많이 흔들린 채 상이 맺혔다. 두 눈의 동공이 크게 열릴 때까지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자 기념관 내부가 두 눈에 들어왔다. 붉은색 벽돌로 쌓아올린 벽면에 놓인 성모마리아상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그곳이 한때 가톨릭 성당이었음을 확인했다.

기념관, 혹은 성당 의자에는 대량학살 희생자의 옷이 셀 수 없을 만큼 잔뜩 쌓여 있었다. 옷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시간이 많이 흘러 제각각 검붉은색으로 바랬다. 성당 뒷마당 지하에는 1만여명의 유해가 보관된 무덤이 마련돼 있었다. 지하의 무덤은 시멘트 구조물이었는데, 유해들이 빽빽하고도 촘촘히 쌓여 있어 마치 뼈들을 잘 정리해놓은 물류창고처럼 느껴졌다. 성당 안쪽 곳곳에는 여전히 수습되지 못한 희생자의 옷가지들이 수북했다. 해마다 4월11일이 되면 이곳에서 사망한 희생자를 위한 추모식을 연다. 대여섯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엄마 치맛자락 뒤에 숨어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슬쩍슬쩍 엿본 것은 성당 바닥에 널브러진 유골들이었다.

르완다 제노사이드가 벌어지던 때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가톨릭의 대량학살 책임을 부인했다. 대량학살에 가담한 가톨릭 성당 관계자에 대해서는 그들이 개별적으로 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바티칸은 22년 동안 침묵했다. 그러다가 2017년 3월20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에서 폴 카가메 현 르완다 대통령을 만나 1994년 대량학살과 관련해 “가톨릭 성당과 성직자들이 저지른 죄와 잘못에 대해 하느님의 용서를 구한다”며 공식 사과했다.



김봉규ㅣ사진부 선임기자.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 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 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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