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칼럼] 메르켈이라면 어땠을까?

한겨레 2021. 10. 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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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칼럼][이진순 칼럼]

화려한 웅변술로 상대를 악마화하고 유일선을 자처하는 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정치의 장에서 개인의 카리스마를 앞세우지 않고 오로지 성과로써 입증하는 메르켈의 문제 해결형 리더십이 높은 신뢰를 받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에게 ‘대선 후보 중에 옳은 일을 한다고 믿을 만한 사람은 누굽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린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해 12월 베를린 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베를린/로이터 연합뉴스

이진순ㅣ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테스토스테론으로 들끓는 남성 클럽과 같았던 독일 정치를 정책 토론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지난달 23일 <비비시>(BBC)는 ‘메르켈 총리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제목의 뉴스에서 전문가의 논평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메르켈은 정치적 이슈를 정쟁의 대상으로 삼아 상대를 공격하기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치밀한 정책 토론을 벌이는 것에 중심을 두었고, 이를 통해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세계 정치에 조용한 혁명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최연소 총리로 선출되어 지난 16년간 독일과 유럽연합을 이끌어온 사람. 보수 성향의 기독교민주당 출신이지만 색깔이 다른 정치세력과 연정을 구성해 원전 폐지, 모병제, 동성 결혼 등 진보적 이슈를 수용하고, 시리아 난민 100만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독일의 도덕적 리더십을 확립한 정치인. 자신을 중용한 헬무트 콜 총리의 비리 의혹에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재임 중 단 한건의 비리나 부패 스캔들도 용납하지 않은 원칙주의자.

케이티 마튼의 <메르켈 리더십>을 보면, 메르켈은 주중에는 베를린의 월세 아파트에 머물면서 직접 쇼핑카트를 끌고 장을 봐 음식을 해 먹고 주말에는 티브이도 없는 동독 지역 시골집에서 지낸다.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가족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여 정치적 선전의 들러리로 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회주의자인 그의 부모는 유권자로서 메르켈의 정당에 한번도 표를 던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메르켈은 정치적 팬덤에 의지하거나 리더십을 인격화하는 것에 진저리를 친다. 정적 타파를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트럼프나 푸틴은 물론, 동시대 정치 아이돌로 등극한 오바마나 마크롱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행보이다.

메르켈은 2020년 퓨 리서치센터가 수행한 여론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질문지 원본을 찾아보니 ‘(그를) 얼마나 지지하는가?’를 묻는 게 아니라 ‘(그가) 옳은 일을 한다는 신뢰를 어느 정도나 가지고 있는가?’였다. 화려한 웅변술로 상대를 악마화하고 유일선을 자처하는 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정치의 장에서 개인의 카리스마를 앞세우지 않고 오로지 성과로써 입증하는 메르켈의 문제 해결형 리더십이 높은 신뢰를 받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에게 ‘대선 후보 중에 누구를 지지합니까?’가 아니라 ‘대선 후보 중에 옳은 일을 한다고 믿을 만한 사람은 누굽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린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대장동 사태의 근원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고, 투기로 인한 폭리의 수혜자가 누구인가를 놓고 연일 여야 간 정치공방이 뜨겁다. 그러나 정작 사건을 보는 유권자들의 마음은 냉담하고 허탈하다. 치열하게 물고 뜯는 대선 후보 간의 폭로전이 아니었다면, 대장동 사태가 이토록 세간의 관심을 끄는 사안으로 부각될 수 있었을까? 투기 전문가와 권력층이 결탁해 천문학적 이권을 챙기는 부패의 사슬은 화천대유 하나뿐일까? 대선 후보와 직접 연관되지 않아 조용히 넘어간 ‘대장동’은 더 없을까? 결국 누군가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겠지만, 차기 정부가 부동산 비리를 발본색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토지와 주택을 불로소득의 꿀단지로 삼는 이들은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대대손손 부동산 불패 신화를 이어왔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할 때는 부동산 부양책을 부르짖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때는 주택 공급 확대를 주장했다. 부수고 짓고, 헐어서 올리고를 반복하면서 주택 공급률은 104%에 이르지만, 집 없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았다. 1980년 59%였던 자가점유율은 2019년에도 58%를 기록해 40년째 제자리를 맴돈다. 지금도 양당 주요 후보는 입을 모아 250만호 주택 공급을 약속한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경기도 분당, 일산, 평촌 등에 신도시 조성으로 공급한 물량이 200만호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 현실성도 실효성도 신뢰하기 힘들다. 해법은 없고 비방만 난무한다. 이럴 때 메르켈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어떤 상황을 고민할 때 결말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바람직한 결과부터 생각하고 역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는 거죠. 중요한 것은 내일 우리가 신문에서 읽을 내용이 아니라, 2년 후에 달성할 결과입니다.”

우리가 그려야 할 ‘결말’은 자명하다. 임대든 자가든 누구나 안정적인 삶의 공간을 보장받는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이란, 그 결말을 향해 치밀한 로드맵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상대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으로 자신의 올바름을 증명하려 드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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