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최고의 군인이자 외교관, 파월이 남긴 '파월 독트린'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윤정 기자 2021. 10. 1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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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국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 게티이미지


“콜린 파월은 군인과 외교관 모두에서 최고 이상을 구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8일(현지시간) 별세한 파월 전 국무장관에 대해 이렇게 추모했다. 파월은 흑인 최초로 미국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에 올라 백인 중심 미국 정가에서 유리천장을 깬 개척자이자 ‘파월 독트린’을 내놓은 군사·국가 전략가였다. 미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파월 독트린은 지금도 미국 외교안보 정책을 돌아보는 중요한 기준”이라면서 “파월의 유산은 계속 되고 있다”고 전했다.

파월 독트린은 가능한 한 무력 개입을 피하되 국가 이익을 위한 개입이 불가피할 경우 압도적인 군사력을 투입, 속전속결로 승리를 결정짓는다는 전략이다. 1990-91년 걸프전을 앞두고 당시 장군이었던 파월이 창안한 독트린을 두고 기자들이 ‘파월 독트린’이라 이름 붙이며 유명해졌다.

파월 독트린은 미국이 군사 행동을 취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8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명시했다. ‘중요한 국가 안보 이익이 위협받고 있는가. 달성 가능한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위험요소와 비용이 완전하고 솔직하게 분석되었는가. 비폭력 해결 수단은 더이상 없는가. 확실한 출구 전략이 있는가. 군사 행동의 결과는 충분히 고려되었는가. 군사 개입이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가. 미국의 결정이 폭넓은 국제적 지지를 받고 있는가.’

파월이 이같은 독트린을 내놓게 된 건 베트남전 참전 경험 때문이다. 그는 1963년 라오스와의 국경을 순찰하는 베트남 보병대대 대위로 근무했다. 당시 작전을 수행하다 죽창 부비트랩을 밟아 다리 부상을 입었다. 이후 그는 1968년 소령으로 진급한 뒤 다시 베트남전으로 복귀했다. 뛰어난 군인이자 지휘관으로 숱한 훈장을 받았지만, 파월은 베트남전을 통해 전쟁의 실상을 목격했다. 전쟁의 불합리성과 허무함을 확신하게 됐고,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낱낱이 알게 됐다. 파월은 1995년 회고록에서 “우리 세대의 많은 군 지휘관들은 미국 국민들이 이해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반쪽짜리 전쟁’을 다시는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파월 독트린은 미 외교안보 정책에서 적절하게 작동되지 않았다. 포린폴리시는 2003년 이라크 침공 전 미 행정부 내에서는 파월처럼 베트남전을 경험한 인사들과 전쟁 경험이 전무한 정책 결정권자들의 논쟁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파월은 베트남전의 교훈을 설파했지만 전쟁 경험이 없던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매파 인사들은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을 밀어붙였다. 파월은 자신이 설정한 독트린에도 불구하고 왜 이라크전을 막지 못했을까. 파월은 2009년 CNN 인터뷰에서 관련 질문을 받자 대통령의 권위를 언급하며 “전쟁을 막기 위해 논쟁을 이어갔지만 일단 대통령이 결정을 내리면 그것이 내각의 결정이 된다”고 답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북핵 문제를 비롯해 중동·이스라엘 관계 등 주요 외교 사안에 있어 파월 장관의 역할은 강경파에 막혀 제한적이었다고 설명했다. 파월은 주로 부시 행정부의 극단적 성향을 완화하고 재앙을 막는 데 한정됐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인 카렌 드영은 “파월은 경솔한 대통령 행동과 잘못된 정책에 대한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주로 했다”면서 “파월은 한 국가의 최고 외교관으로서 자신이 이런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이라크전 당시 인생 최고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200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의혹을 제기하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이듬해 잘못된 증거를 제공받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당시 정부에서 그는 ‘올드맨’ 취급을 받았고 핵심 정보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파월은 “유엔 연설은 나를 늘 따라다닐 것이다. 부고에도 실리게 될 것”이라며 인생 최대 오점으로 유엔 연설을 꼽았다.

포린폴리시는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철수 과정에서의 혼란을 언급하며 지금 이 시대 ‘파월의 유산’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냉전시대의 자만심은 미국을 베트남전으로 이끌어 패배를 안겼다. 당시 미 행정부 내에서 이러한 참패를 두고 ‘베트남 신드롬’이 일었는데 현재 다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쌍둥이 수렁을 뜻하는 ‘이라키스탄 신드롬’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포린폴리시는 미국의 외교 안보 정책이 더 난장판이 되기 전에 파월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파월은 자신의 독트린을 ‘도자기 가게 규칙(Pottery Barn rule)’에 비유하곤 했다. “도자기를 깨뜨리면, 그 깨진 도자기를 사야 한다(you break it, you buy it).”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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