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음의 첫 줄은.." 미국인 존경 받은 콜린 파월이 후회한 한가지

이철민 선임기자 2021. 10. 1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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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숨진 콜린 파월 전(前) 미국 국무장관(84)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인이었다. 그는 합참의장 시절이던 1991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군을 격퇴하는 걸프전을 단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베트남 전쟁 이후 해외 군사 개입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의 신뢰를 샀고, 흑인으로선 최초의 4성 장군, 합참의장, 국무장관이 됐다. 당연히 그의 죽음을 맞아, 그를 추모하는 여러 일화들이 미 언론에 소개된다. 그는 또 “미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외국 영토를 점령하는 상황은 피해야 하며, 결코 피할 수 없을 때에만 전쟁을 하되 적을 신속하게 파괴해 적대 행위를 끝낼 수 있도록 압도적인 무력으로 전쟁에 돌입한다”는 요지의 파월 독트린으로도 유명하다.

콜린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이 2003년 2월5일 유엔 안보리에서 이라크가 탄저균을 담는데 사용했다는 시험관(vial)을 들어보이며 이라크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수십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초래한 이 전쟁에서 미국은 이라크 정부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프로그램 증거를 한 건도 확보하지 못했다./AFP 연합

그러나 파월은 생전에 2003년 국무장관으로서 자신이 유엔 안보리에서 이라크 전쟁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것을 최대 ‘오점’으로 생각했다. 그는 2020년 7월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내 부음(訃音) 기사의 첫 문장은 이 안보리 연설을 포함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3년 2월5일, 파월 미 국무장관은 유엔 안보리에서 “이라크가 생물‧화학‧핵무기를 개발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고 있으며, 보수적인 추정으로도 이미 100~500톤의 화학무기 재료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90분간 연설에서 “동료 여러분, 오늘 나의 모든 발언은 반박이나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 뒷받침 된다”며 “내가 말하는 것은 확실한 정보에 기초한 사실이자 결론”이라고 강조했다. 한 달 반 뒤인 3월 19일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군 4431명이 전사하고 이라크 민간인 20만 명이 숨진 이라크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미국은 침공의 원인이 됐던 대량 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의 증거를 단 한 건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임기 첫해인 2001년 9‧11테러가 발생했다. 소련의 붕괴이후 미국 단극(單極) 체제인 국제질서 속에서 미국의 힘을 과신한 부시 행정부의 매파들은 희생제물을 찾기에 혈안이 됐다. 부시 스스로 “핏속에 끓는 복수의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다”고 했고, 딕 체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팔레스타인 무장세력들과 (9‧11테러를 일으킨) 빈 라덴의 스폰서”라고 주장했다. “글로벌 대(對)테러 전쟁은 반드시 이라크를 포함해야 하며, 사담 후세인은 뱀의 머리”라는 이들의 주장은 갈수록 힘을 얻었다.

파월은 이들 네오콘(neocons)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2002년 8월 부시 대통령에게 어느 참모도 하지 않는 말을 했다. “만약 뭔가[이라크]를 부러뜨리면, 그걸 책임져야 할 것이고, 첫 번째 임기 내내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는 2500만 이라크인과 서로 으르렁대는 18개 주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파월은 “사담은 상자에 갇힌 악한(惡漢)이니까, 계속 상자를 잘 쌓아놓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파월은 이라크 전쟁의 당위성을 둘러싼 부시 행정부 내 논쟁에서 졌다. 그는 주위에 “나 자신이 미치광이(crazies)들에 맞서 후방을 지키는 이단아 같다”고 털어놓곤 했다.

파월에게 더욱 역설적인 순간은 경력의 최정점에서 ‘이라크 침공’이라는 잘못된 결정을 전 세계에 설득하는 세일즈맨이 돼야 했다는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과 체이니 부통령, 럼즈펠드 국방장관 모두 미국에서 가장 신뢰와 존경을 받는 그가 유엔에서 전쟁의 불가피성을 알리기를 원했다. 체이니는 “당신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데, 그 인기 갖고 뭐 좀 해 보라”고 했다. 파월은 이라크와 전쟁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믿었지만, 결국 그 요구를 수락했다.

파월은 대신에 부시 대통령에게 현재 미국 정보당국이 확보한 ‘이라크 WMD 개발 프로그램’의 증거들을 직접 일일이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미 중앙정보국(CIA) 건물에서 수일간 먹고 자면서, 모든 증거를 면밀히 검토했다. 3,4명의 정보원들로부터 취합되지 않은 정보들은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파월은 ‘이라크 침공의 불가피성을 내세울 증거는 확고하다’고 결론 내렸다. 파월의 2003년 2월 유엔 안보리 연설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그러나 그때 파월이 몰랐던 것은 그가 최소 서너 명의 독자적인 정보원으로부터 얻은 일치된 증거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이라크 국민회의(ING)’라는 망명 단체 한 곳에서 여러 소스로 둔갑해 미 정보당국에 제공한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CIA도 이걸 몰랐을까. 파월은 은퇴 후에도 이 일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으나, 당시 그와 함께 정보의 신빙성을 따졌던 로런스 윌킨스 장관 비서실장은 “CIA는 소스에서 이상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았겠지만,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며 “돌이켜보면, 대량살상무기 개발‧빈라덴 연관 증거라는 것들이 모두 이라크 망명자들이 만들어내고 재활용하는 추정과 가정들이었다”고 NYT에 말했다.

파월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유엔 안보리 연설 요구를 거부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 언론에선 그 경우 그는 국무장관직을 사임해야 했었을 것이고, 그의 사임은 국무부 내 다른 주요 고위직의 잇단 사임을 초래하고 영국을 비롯한 주요 우방국들에도 ‘이라크 증거’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게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최소한 연기됐거나 무산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그러나 파월은 이라크 전쟁에는 반대했지만, 결코 사임하지 않았다. 그는 NYT에 “내게 무슨 선택권이 있었을까요. 그는 대통령인데”라고 했다. 파월은 자신이 역사에서 누구도 원치 않을, ‘외로운 자리’의 주인공이 될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파월의 유엔 안보리 연설을 듣고 난 야당인 민주당의 상원대표 탐 대슐은 동료의원들에게 “체이니야 믿을 수 없지만, 어떻게 콜린 파월을 안 믿겠느냐”며, “나는 이제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미 주간지 뉴요커는 파월의 유엔 안보리 연설은 “있지도 않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저지하는 전쟁을 위해 평생 쌓아온 신뢰를 소진해야 하는 경력 상 가혹한 아이러니가 됐다”면서도 “이 결정적인 순간에, 파월은 늘 자신이 원했던 ‘좋은 군인(the good soldier)’으로 남기로 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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