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실명소설 '저격'] 개화의 날이 밝다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

방현석 입력 2021. 10. 1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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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이 8월 15일 광복절에 귀향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방현석 소설가의 '홍범도 실명소설 <저격>'을 주 2회(화요일, 금요일)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방현석 기자]

   
11

世道飜換.
홍영식의 겸종 이흥완이 화톳불 옆 땅바닥에 네 글자를 써놓고 물었다. 영사의 밀지에도 쓰여있던 글자였다.

"이걸 뭐라고 읽는지 알아?"
상한들과 경위감의 병사들 모두 고개를 저었다.

"세도번환, 세상의 질서를 뒤집어 바꾼다. 이제 세도번환이 일어날 것이다. 능력이 있으면 상놈들도 관직을 할 수가 있다. 너희들도 얼마든지."
이흥완을 바라보는 상한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이흥완이 우리 경위감의 병사들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병졸도 실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무관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볏짚 하나 못 베는 칼솜씨와 눈앞의 표적도 못 맞히는 사격술을 가지고도 양반이란 이유 하나로 무관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는 세상은 이제 끝이 날 것이야."
"에이, 그런 세상은 없단 말입니다."
백무현이 죽동궁에서 한 시비를 다시 걸었다.

"개화를 한 일본은 이미 그런 세상이 되었어. 미국과 법국, 구라파는 그런 세상이 된 지 옛날이고."
"그런 세상이 오면야 좋겠지만, 언제 그런 세상이 오겠어요."
경위감에서 나 다음으로 어린 남창일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언제?"
남창일에게 되물은 이흥완이 몸을 돌려 우리를 한 명씩 뜯어보듯 둘러 보았다. 언제? 답을 맞춰보라는 듯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공격적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보게 될 거야, 그런 세상."
이흥완의 목소리는 자신만만했지만 움켜쥔 주먹은 떨리고 있었다.

"그런 엄청난 일이 내일 아침에 벌어진다고요?"
남창일이 눈빛을 반짝이며 반문했다.

"시작은... 내일 아침이 아니라 이미 지난 밤에 시작은 되었네. 무능하고 부패한 탐관오리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 외울 수도 없는 수십 가지 세금을 바치느라 언제까지 백성들이 죽어나게 내버려 두겠나. 조선도 개화를 해야지. 탐관오리는 처벌을 하고,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일도 더는 없을 것이야."
"그러면, 청나라가 가만히 있질 않는단 말입니다."
백무현이 다시 나섰다.

"원세개가 삼천이 넘는 청나라 군사를 이끌고 유람하러 조선에 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이흥완은 비웃음을 한입 베어 물고 백무현을 삐딱하게 쳐다봤다.
"청나라 군대의 절반은 이미 안남으로 떠났고, 안남에서 청나라가 불란서한테 박살이 났단 말입니다."
이흥완이 백무현의 말투를 흉내 내며 입술을 내밀었다.
"남은 절반은 적습니까."

나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는 백무현을 가로막았다. 놈들의 얘기를 들어두라는 박한 초관의 말을 떠올리며 이흥완에게 물었다.
"그래서, 세도번환, 그 일을 누가 합니까?"
"개화파지."
"그런 엄청난 일을 하려면 무력이 있어야 하는데, 개화파는 군대가 아니잖아요?"
나는 한 번 더 이흥완에게 미끼를 던져보았다. 흥분 상태인 이흥완은 바로 미끼를 물었다.

"그건 걱정할 게 없어. 우리에겐 일본군이 있으니까."
"이백 명도 안 되는 일본군을 가지고 수천 명의 청나라 군대를 당한단 말입니까. 어림없습니다."
백무현이 다시 끼어들었다.

"구닥다리 오랑캐놈들 천오백 명, 숫자만 많지 잘 훈련된 일본 신식군대한테는 상대가 되지 않아. 벌써 궐 안에 들어간 일본군이 주상을 지키고 있어."
"아니 세도... 번잡인가 무시기, 그 좋은 일을 하는데 왜 왜구들을 끌어들여요. 우리 파총같은 훌륭한 사람들하고 해야지."
앞뒤를 모르는 남창일이 이흥완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너희 파총이 훌륭해? 우영사의 오른팔, 완고파가 아니던가?"
이흥완은 내일 아침에 온다는 그 세상을 이미 맞이한 사람 같았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우영사는 지난번에 죽동궁으로 그쪽 영감들을 초대하고, 개화파들과도 아주 친하다고 들었는데, 완고파라고 해서 다친 거예요?"

이흥완이 주춤했다. 너무 깊이 찔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나는 이흥완의 눈길을 피하며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은하수는 축시의 한복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은 해가 쨍쨍하겠네..."
"시각이 얼마나 된 것 같은가?"
그 세상이 온다는 아침을 기다리려니 너무나 속이 타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축시, 자시가 지났으니 어제는 갔지만 아직은 인시가 오지 않았으니 오늘은 시작되지 않았다.

"곧 인시니까. 파루를 알리는 북이 울리겠네요."
나는 이흥완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시간을 당겨 말했다.

"이제 곧 개화의 시간이 열리겠고, 개화의 시간을 가로막았던 완고파들도 끝이 날 것이야. 영사들도 모두 해가 뜨면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이흥완에게 들릴까봐 걱정스러웠다. 이흥완은 축시 다음에 인시가 오는 것처럼 개화의 시간이 오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전, 후, 좌, 우영사들 모두 없애야 하는데 우영사는 천운을 타고 난 거야. 우리 총판영감이 낙명의 순간에 옛 정리를 생각해서 보아준 것인데, 이제 어느 쪽에 설 것인지는 우영사가 선택할 일이지."
이흥완의 얘기는 전, 후, 좌영사를 해가 뜨기 전에 처치한다는 소리였다. 나는 이 상황을 박한 초관, 정태신 파총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너무 많은 얘기를 들은 나는 이흥완 앞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각이 더 지나서야 이흥완이 상한들과 어울려 한 눈을 파는 사이 백무현을 군영으로 보냈다.

"전, 후, 좌영사를 해 뜨기 전에 없애려고 한다. 그 말만 전해요."

12

야금 해제를 알리는 북소리가 밤을 갈랐다. 오경이 넘은 시각이지만 시월의 새벽은 아직 어두웠다. 파루의 북소리가 서른세 번 울리도록 백무현도, 박한 초관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보다 더 초조하게 골목 입구를 바라보며 서성거리는 것은 이흥완이었다.

묘시가 넘어서야 골목이 훤해졌다. 골목길에 처음 들어선 것은 김옥균의 겸종 차이경이었다. 죽동궁에서 보았을 때처럼 입술을 살짝 사려 문 녀석은 이흥완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내게도 고개를 숙여보였다. 수청방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던 나를 기억하는 걸로 보아 눈썰미는 예사가 아니었다. 어린 녀석이지만 여전히 몸가짐이 신중하고 표정이 경박하지 않았다. 녀석의 표정으로는 이흥완이 기다리는 아침이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차이경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로 이흥완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흥완의 입가가 길게 찢어지기 시작했다. 이흥완의 이마에 박힌 검은 점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차이경의 이야기를 다 들은 이흥완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오른쪽 주먹을 움켜쥐며 치켜들었다. 둘을 지켜보고 있던 상한들이 덩달아 두 주먹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그럼, 온다는 그 좋은 세상이 온 거예요?"
경위감의 남창일마저 덩달아 주먹을 치켜올리려는 것을 내가 가만히 붙잡았다. 이흥완이 남창일의 팔을 잡은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전, 후, 좌영사는 갔다."
그리고는 목인덕 고문의 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발을 옮겨 대문을 가로막았다.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은 갔다고 했다."
모두 지난번 죽동궁 행사에 왔던 인물들이었다.

"이제 너희 영사도 민대감이 아니다."
나는 대문 너머를 삐딱하게 쳐다보는 이흥완의 눈이 아니라 손과 발을 지켜보았다.

"좌의정은 우리 홍영식총판, 호조 참판은 김옥균 영감, 전후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영감, 좌우영사 겸 우포장 서광범 영감이다. 너희 영사는 이제 민영익이 아니라 서광범 영감이란 말이다."

그들 모두 죽동궁 모임에 왔던 인물들이었다. 그날 죽동궁에 왔던 인물들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을 없앤 것이다. 그리고 죽동궁의 주인은 중상을 입고 양의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그러니 이제 너희들이 지킬 영사는 여기에 없다. 군영으로 돌아가라."
"영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나 우리의 직속 상관은 정태신 파총이고, 우리는 상관의 명령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군병들입니다."
나는 언제 칼을 뽑아 들지 모를 이흥완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던가."
이흥완은 손목의 근육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다. 초조함으로 떨리던 손끝의 신경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지난밤의 이흥완이 아니었다. 이흥완은 차이경에게 목인덕 고문의 집을 맡긴 뒤 상한 하나를 데리고 왕과 개화파가 있는 경우궁으로 떠났다.

차이경은 잔뜩 들뜬 이흥완과는 달리 차분했다. 어찌보면 침울해보였다.

"저 자가 한 말이 사실인 거야?"
차이경은 여전히 입술을 살짝 말아 물고 고개만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반상의 차별이 없는 세상, 우리도 무관이 될 수 있는 세상이 정말 온 거예요?"
남창일의 물음에 차이경은 고개를 움직였는데 그것이 끄덕인 것인지, 가로저은 것인지, 갸웃거린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차이경의 눈빛에는 기대와 불안,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이흥완이 밤새 그렇게 기다렸던 아침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해가 중천에 솟은 다음이었다.

"붙었어, 방이 붙었어."
상한 하나가 골목 안으로 뛰어오며 소리쳤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고 코쟁이 둘이 나왔다. 앞서 나오던 이 집의 주인 목인덕이 우리를 향해 물었다.
"쩐 머 훼이 쓰?" (어떻게 되었느냐?)

청나라 고문으로 조선에 온 덕국 출신의 코쟁이 목인덕은 청나라말을 썼다. 나는 옆에 선 차이경을 쳐다보았다.

"라우 시엔셩. 파 꿍꺼우 러." (선생님. 방이 붙었습니다.)
차이경이 청나라말로 대답을 하며 손으로 골목 밖을 가리켰다. 눈이 휘둥그렇게 된 건 나만이 아니었다. 경위감원들과 상한들 모두 커진 눈으로 청나라 말을 주고받는 차이경과 목인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즈 따오 러." (알았다.)
차이경은 뒤 따라 나오는 코쟁이에게 더 이상한 말로 물었다.

"닥터 알렌. 하우 아 유 미스터 민?"
양의사 안연이 못 알아들었는지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하우 아 유?"
차이경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과 목을 여러 번 찔러 보이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미스터 민. 미스터 민."
"아, 예스. 히 이즈 베럴, 굿."

양의사는 엄지를 내밀어보이며 답했다. 상한들이 경호인지, 감시인지 두 사람을 앞뒤로 지키며 따라갔다. 우리는 영사가 있는 집을 두고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일각이 지나지 않아서 양의사만 호위하고 돌아오는 상한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남아 있던 상한들과 경위감원들에게 큰길에 붙은 방을 보고 오라고 했다.

서로 경계를 위해 상한들과 경위감원들이 짝을 지어 차례로 우정총국 맞은편 대로에 붙은 방을 보러 갔는데, 갈 때와 달리 올 때는 한패가 된 것 같았다.

"점박이의 말이 정말이야."
"틀린 말이 없잖아."
아무도 싫은 표정이 아니었다. 나와 차이경이 마지막이었다. 말없이 함께 골목을 빠져나간 우리는 나란히 서서 아직 풀이 마르지 않은 방을 읽었다.

1.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의 폐지하고 청나라에 잡혀간 대원군을 환국시킨다.
2. 문벌을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백성을 보호하고 국가재정을 확충한다.
4. 탐관오리를 치죄하고 관리의 부정을 엄단한다.
5. 유배 보낸 자와 옥에 갇힌 자는 정상에 따라 감형한다.
6. 4영을 1영으로 통합하고, 영중의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설치한다.
7. 정부·육조 외의 불필요한 기관을 없애고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총괄한다.

정령을 쳐다보는 김옥균의 겸종 차이경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겸종들 중에서 제일 진중했다.

"몇 살이야?"
"그건 왜?"
"속에 노인이 든 거 같아서."
"열여덟. 너는?"
"나도."

나도 군적에는 어엿한 열여덟 살이었다. 긴 정령 옆에 붙은 방에는 바뀐 내각의 명단이 붙었다. 우의정 홍영식, 전후영사 겸 좌포장 박영효, 좌우영사 겸 우포장 서광범, 호조참판 김옥균, 병조참판 겸 정령관 서재필...

"좋겠네."
"뭐가?"
나는 턱으로 방에 오른 명단을 가리켰다.

"호조참판이네."
김옥균의 이름은 네 번째 있었다.

"난 서재필 영감의 집으로 옮겼어."
"그 새? 일본 사관학교 나왔다는 그 새파란 교관."
어린 차이경이 모신 젊은 영감의 이름 둘이 명단의 다섯 번째 안에 들어 있었다. 녀석은 그런데도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너도 한자리하겠네."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냥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하고 싶어. 그래서 김옥균 영감을 따라 절에서 나왔던 거구."
"그럼, 중이었어?"
"응. 화계사에 있었어."

절을 떠올리는지 녀석의 눈빛이 잠시 아련해졌다. 순수해보이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 깊이가 도무지 짐작되지 않던 녀석의 눈빛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덕국이나 법국에 공사로 가면 되겠네. 이상한 나라 말도 잘 하던데."
"관직은 싫고 여러 나라말을 공부만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차이경은 처음으로 수줍게 웃었다. 갑자기 친구가 된 것 같은 이 느낌, 이게 뭐지 생각하는 순간 박한 초관이 주고 간 임무가 떠올랐다.

"전, 후, 좌영사가 어떻게 되는지 정말 봤어?"
차이경의 표정이 굳었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경우궁에서 간밤에 벌어진 일을 얘기해준 것은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이었다. 그것이 녀석과의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친구로 느낀 두 번째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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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방현석은 소설가다. 소설집 <사파에서>, <세월>, <내일을 여는 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새벽 출정>과, 장편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십 년간>, <당신의 왼편>이 있다.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하노이에 별이 뜨다> 와, 창작방법론 <이야기를 완성하는 서사패턴 959> 등을 썼다. 신동엽문학상(1991), 오영수문학상(2003), 황순원문학상(2003) 등을 받았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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