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에서 백두까지 마라톤을 시작하며

입력 2021. 10. 1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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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에서 백두까지]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는 남북평화를 내걸고 2015년에 미국 대륙을 횡단했고, 2017년 9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13개월동안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중국 단둥까지 홀로 1만5000킬로미터 유라시아 횡단 마라톤을 했습니다. 그때도 남북평화를 내걸고 달렸습니다. 북한에서 입국 허가를 내주지 않아 한반도 1000킬로미터만 남겨둔채 미완인 상태입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이번에 다시 '한라에서 백두까지'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프레시안은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보내온 자신의 여정 10회에 걸쳐 싣습니다. 편집자

다시 한라에서 백두까지 달리기를 시작한다. 이번이 4년 차이다. 

시작은 언제나 한라산 백록담에서 시작하지만 언제나 임진각에서 끝났다. 그 너머에는 철조망, 아니 어마어마한 절벽이 가로 막혀있었다. 내 할머니와 아버지가 살아서는 도저히 넘지 못한 절벽, 육신의 탈을 벗어버리고서야 기어이 그곳을 넘었을 절벽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내 가슴에 조그만 불씨 하나 날아든 것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시집간 딸 하나 남겨놓고 어린 다섯 아들 북어 엮듯이 엮어 손잡고 피난 내려와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내 할머니의 한숨에서 날아왔는지. 아니면 내 어머니보다도 더 그리웠을 고향에 두고 온 아버지의 첫사랑의 고개 숙인 그림자로부터 인지도 모른다. 혹시 그것은 한반도 구석구석 어디에도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다니는 것인지 모른다.

나의 달리기의 시원(始原)이, 내가 평범한 체력을 가지고 이리도 미친 듯이 달리는 이유가 아버지와의 화해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의 그 퀭한 눈동자가 미치도록 싫었다. 어릴 때는 태산 같은 존재였지만 곧 철이 들자 고집이 세고 정이 없고 병약한 사람으로 내게 비쳐졌다. 많은 시간 아버지는 어색한 존재였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헤아리지 못했다. 분단(分斷)은 아버지와 자식 사이로 흐르는, 부부지간에 흐르는 애정의 강물마저도 막아서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금까지도 아버지와 화해를 하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살아서는 도저히 가지 못한 머나먼 길을 가기 위하여 역발산으로 세상사람 아무도 달려보지 않은 16,000km를 달려서 가기로 결심했었다. 아버지의 핏줄에 흐르다가 내 핏줄 속에서 거칠게 일렁이는 대동강에 발을 담그고 아버지 살아서는 이루지 못한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내려올 것이다. 그곳에서 영혼으로 머무를 아버지를 만나 “사랑합니다. 아버지!” 소리 높여 외치고 눈물 한 무더기 대동 강물에 섞고 오겠다고 결심하고 출발했었다. 65세의 나이에도 한 번도 못한 할아버지의 산소에 성묘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마음대로 안 되었다.

한 개인의 역사는 한 나라의 역사와 평행을 이룰 수밖에 없다. 한 개인이 불행하면 결국 국가의 어깨를 짚고 일어서야한다. 평화는 어떤 영웅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힘을 모아서 사회적 거대 담론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내는 것이라야 지속가능한 평화가 된다. 하여 내 평범한 가족사로 평화마라톤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이유이다. 평범한 시민은 영웅만큼 힘이 있지는 않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이야기로는 안성맞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마음을 열고 내 가슴 속의 불씨를 보여주었더니 그 사람도 가슴에 그런 불씨가 있단다. 불씨는 불씨와 만나 불꽃으로 피어난다. 아직은 작고 부끄러운 불씨에 불과하지만 서로의 가슴 속에 품었던 통일의 불씨를 꺼내 이으면 누구도 막지 못할 통일의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광야를 태울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평화에 대한 공감(empathy)을 확산시키는 도구로 달리기를 선택했다.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하게 멀고 험한 길을 달리는 것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겐 큰 행운이었다. 길이 멀고 험해도 달려서 가지 못할 길은 세상엔 없다. 평화의 길이 그렇다. 포기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면, 그렇게 하루 종일 뛰고 한 달을 뛰고 일 년을 뛰면, 그래도 안 되면 모든 걸 다 걸고 지구 끝까지도 달려갈 것이다.

나는 작년 5월 달에 뇌경색에 걸려 반신마비가 왔다. 한반도의 휴전선은 우리나라에 뇌경색을 일으키게 했다. 한반도가 앓고 있는 모든 병의 원인은 휴전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이 소통하고, 물류가 소통하면 동맥경화 뿐 아니라 뇌경색도 풀린다. 나는 어쩌면 돈키호테보다도 더 무모하게 한라에서 백두까지 절름거리며 달리면서 뇌경색에 걸린 내 몸의 어혈(瘀血)을 풀어주고 한반도의 어혈을 풀며 평화의 시대, 상생 공영의 혁명을 꿈꾸겠다. 사람은 서로 만나서 느끼고 함께 있으면 실타래처럼 엮이고 하나가 된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인간들이 신의 힘에 도전하기 위하여 하늘 높이 바벨탑을 쌓는다. 하나님은 노하여 이를 무너뜨린다. 무너뜨리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언어를 수백으로 나뉘게 하여 소통을 못하게 했다. 대화와 소통은 하나님도 두려워할 만큼 놀라운 힘이 있다. 그 가공할 힘이 바로 우리는 평화를 지켜낼 힘의 원천이다. 사드도 필요 없고 핵무기도 필요 없다. 오로지 대화와 소통이 필요할 따름이다.

넘어지고 깨지고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더 결기를 다질 것이다. 이 일은 포기할 수도 없고 새 세상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넘어질 것이 두려워 바위산을 넘을 생각도 않는 비겁한 겁쟁이 되느니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뛰는 상처 입은 표범이고 싶었다. 나는 실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 달렸고, 또 우리는 실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 달릴 수 있다. 함께해주고 마음 모아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그 길을 묵묵히 달려갈 것이다. 언제나 슬픔과 허망함에서 더 큰 희망과 용기가 나온다.

힘내라 대한민국! 가즈아! 한라에서 백두까지!

▲유라시아 횡단 마라톤 중인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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